역사/중국

서한(전한)의 전성시대를 연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개요

올드코난 2015. 12. 2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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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황제들 중 재위 기간을 따져 보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36-1795년 재위)와 강희제(康熙帝 1662-1722년 재위)에 이어 한무제가 3번째로 54년간 재위에 있었다.

경제(景帝)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유철(劉徹 기원전 140-87년 재위)이 뒤를 이었다. 한(漢) 왕조에서 한무제(漢武帝) 유철은 고조 유방을 제외하면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업적만 갖고 논한다면 무제는 역사적으로 필적할 인물이 드물 정도로 무제 시대는 군사, 경제, 사상,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서한(西漢) 왕조의 극성기라 할 수 있다. 흔히 무제는 후대 황제들의 전형을 수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무제 시대는 한(漢) 대의 사상사, 문학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사, 경제사, 정치사의 영역에서도 획기적인 시대였다. 무제 시대의 한나라는 단순히 중국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대국(大國)이었으며 중국 문화도 이때부터 주변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무제는 또 단순히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이전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화하(華夏)민족의 전통 속에 깊이 스며들도록 했다.


역사학자들이 일컫는 ‘한당성세(漢唐盛世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태평성세)’에서 한(漢)이란 사실상 한무제 시기였다. 일찍이 진시황이 꿈꿨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고 황제 권력을 절대적으로 강화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제의 통치는 진시황과 닮은 점이 많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진황한무(秦皇漢武)’라 하여 진시황과 한무제의 업적을 서로 비교하기도 한다.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는 한무제에 대해 ‘걸출한 재주와 웅대한 계략(雄才大略)’있었다고 극찬했다.


후대에 끼친 무제의 영향 중 대표적인 것은 연호의 사용이다. 이전에는 설사 제왕이라 할지라도 따로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제 시대에 최초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자신의 연호를 사용했다. 즉, 무제가 즉위한 첫 해를 건원(建元 연호를 처음 세웠다는 의미) 원년으로 삼아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청(明淸) 시대 이후에는 아예 연호로 특정 황제의 시대를 지칭하게 되었다. 가령, 영락제(永樂帝), 강희제(康熙帝), 건륭제(乾隆帝)라고 할 때, 영락, 강희, 건륭의 호칭은 연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외에 현재 중국인의 주류를 지칭하는 한족(漢族)이란 단어도 은하수를 뜻하는 ‘천한(天漢)’에서 온 것인데 이는 한무제가 사용한 연호의 일종이다. 그 외에도 무제는 이전보다 영토를 크게 확장해 지금의 복건(福建), 광동(廣東)에서부터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남(雲南) 및 신강(新疆)의 일부 지역 및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 요녕(遼寧)에까지 이르렀다. 무제가 개척한 이 광활한 영토는 비록 일부 변동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후 약 2천 년간 중국 국경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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