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은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황조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황조다. 수도는 장안으로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5대 문제(文帝), 경제(景帝)에서 시작된 전한의 선정은 무제(武帝)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무제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은 결국 권력투쟁까지 했다. 그중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섭정하여 그 위세가 극에 달했고 결국 전한을 멸망시킨다. 이후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제위에 올랐고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방계 후손 유수(劉秀)에게 멸망당한다. 전한시대의 황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제1대 고조 유방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한나라(漢)의 초대 황제(재위 :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는 계(季).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秦)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가 항우(項羽)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정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제2대 혜제
한 효혜황제 유영(漢 孝惠皇帝 劉盈,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88년) 전한의 2대 황제(재위 :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고제(高帝)의 차남이자 적장자로, 어머니는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매우 선량하고 우애가 깊고 약한 심정을 가진 인물로 야심이 큰 어머니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혜제는 결국 기원전 188년,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하였다. 시호는 효혜황제(孝惠皇帝). 능호는 안릉(安陵)
제3대 소제 유공(劉恭)
한 소황제(漢 少皇帝, ? ~ 기원전 184년, 재위 : 기원전 188년 9월 - 기원전 184년 8월) 전한 제3대 황제, 휘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대 황제에게 포함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혜제와 장황후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양자로 들여서 양육하였으나 일설에는 남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설과 혜제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는 설이 전해진다. 여태후는 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려하여 소제의 생모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88년, 혜제가 승하한 후 등극하여 소제가 된다. 여태후는 소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정사에 관여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는 등 전횡을 일삼는다. 기원전 184년, 소제가 성장하면서 과거 진상을 듣고 보복할 것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데 이를 알게된 여태후는 대외적으로 중병이라 공표하곤 그를 유폐시킨 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곧 시해한다.
제4대 소제 유홍(劉弘)
한 소황제 유홍(漢 少皇帝 劉弘, ? ~ 기원전 180년) 전한 제 4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4년 ~ 기원전 180년). 본래 휘는 산(山)이었으나 항산왕(恒山王)이 된 이후에는 의(義)로,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홍(弘)으로 고쳤다 혜제(惠帝)와 후궁인 미인 주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처음은 양성후(襄城侯)으로 봉해졌다. 항산왕(恒山王) 유불의(劉不疑)가 죽자, 그 대를 이어 항산왕으로 봉해졌다. 후에 형 소제(少帝)가 여태후에 살해되고 황제로 즉위했다.
고후 8년(기원전 180), 고후(高后)가 죽었다. 황족 및 대신 진평(陳平) · 주발(周勃) · 관영(灌嬰) 등의 주도로 여씨 일족이 축출되었고, 소제는 형제들과 함께 감금되었다. 곧 대왕(代王)이 조정으로 와 황제로 즉위하였고(문제), 즉위 직전에 소제 유홍은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에 의해 궁내에서 추방되어 소부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대왕이 입성한 후 소부에서 형제 항산왕,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과 함께 시해되었다. 소제와 상산왕, 양왕, 회양왕은 혜제와 혜제의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모두 진짜 아들이었다. 그런데 장황후가 그들을 모두 자기 아들로 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해 대신들에게 여후가 세운 가짜라고 의심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제5대 문제 유항(劉恆)
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이다. 고제(高帝)의 사남이자 혜제(惠帝)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효문태후(孝文太后)이다. 즉위 전 대(代)나라 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지치를 이룩하였다. 기원전 157년 6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사망했다. 도덕적인 군주로 평가되며 어머니 박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다. 능호는 패릉(覇陵)
제6대 경제 유계(劉啓)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선정을 행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또한 후한 왕조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 시대의 촉의 창시자 유비는 경제의 먼 후손을 칭했다. 재위 15년 째인 기원전 14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호는 양릉(陽陵)
제7대 한무제 유철(劉徹)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로 아명은 체(彘)이며 자는 통(通)이다. 경제의 열한번째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韓半島)에 한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능호는 무릉(茂陵)
제8대 소제 유불릉(劉弗陵)
한 효소황제 유불릉(漢 孝昭皇帝 劉弗陵, 기원전 95년 ~ 기원전 74년) 전한의 제8대 황제(재위 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이다. 무제와 구익부인 소생이다. 기원전 87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즉위전 여태자가 역모로 죽임당하고 장성한 아들 창읍애왕마저 병으로 죽자 장성한 다른 아들 연날왕 유단, 광릉여왕 유서가 있음에도 구익부인 조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을 태자로 내정하였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에게 젊은 모(태후)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구익부인 조씨를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인척들을 축출하였다. 그 뒤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능호 평릉(平陵)
제9대 전한 폐제
한 폐제(漢廢帝) 또는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는 전한의 제9대 황제(재위 기원전 74년)이며 세종 무제의 서손자이자 창읍애왕 유박(劉髆)의 아들이다. 뒤에 강등당하여 해혼후(海昏侯)가 되었다. 사마광은 그가 소제(昭帝)의 빈소에 가면서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길위에서 고기 반찬을 먹으니, 곽광(霍光)이 그 죄를 묻고 폐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소학의 외편에 고사로 인용되었다.
제 10대 전한 선제 유순(劉詢)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은 전한의 제 10대 황제(재위 :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로, 자는 차경(次卿)이다.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즉위할 때 순(詢)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고,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 곽광이 죽곡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무제 이후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을 보류했다. 능호 두릉(杜陵)
제 11대 전한 원제 유석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 기원전 76년 ~ 기원전 33년)은 중국 전한의 제11대 황제(재위 기원전 48년 ~ 기원전 33년)로, 자는 성(盛)[1] 이다. 선제(宣帝)의 장남이며 허평군(許平君) 소생이다.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근거하는 정책도 실시되어 전매제를 폐지해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시켰다. 선제에 의해 중흥 된 국세는 다시 쇠약해져 원제의 황후 왕씨 일족으로부터 나온 왕망의 찬탈의 요인을 만들어 냈다. 후한의 역사가 반표(班彪)는 그 치세를 「우유부단으로 하여 선제의 업적 쇠약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제 12대 전한 성제 유오(劉驁)
한 효성황제 유오(漢 孝成皇帝 劉驁, 기원전 51년 ~ 기원전 7년, 재위 기원전 33년 ~ 기원전 7년)는 전한의 12대 황제, 자는 태손(太孫)이다. 주색에만 빠져있었고 성제는 황태후 왕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능력과 덕도 부족했던 인물로 조합덕의 침상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성제가 급사한 지 얼마되지않아 조합덕은 자살하였다고 한다. 능호 연릉(延陵)
제 13대 전한 애제 유흔(劉欣)
한 효애황제 유흔(漢 孝哀皇帝 劉欣, 기원전 27년 ~ 기원전 1년)은 전한의 13대 황제. 남자를 밝혔던 황제. 능호 의릉(義陵)
제 14대 전한 평제 유간(劉衎)
한 효평황제 유간(漢 孝平皇帝 劉衎, 기원전 9년 ~ 기원후 5년,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 전한의 14대 황제. 본래 휘는 기자(箕子)였으나, 간(衎)으로 고쳤다. 중산효왕 유흥(中山孝王 劉興)의 아들로 어머니는 위희(衛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중산왕이 되었으며 애제의 죽음으로 아홉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기원후 4년 왕망의 딸을 황후로 맞았고 이듬해에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 연호는 원시(元始). 능호 강릉(康陵)
제 15대 전한 유자 유영(劉嬰)
유자영(孺子嬰, 5년 ~ 25년, 재위 : 6년 ~ 8년11월)은 말대황제(末代皇帝),정안공(定安公)으로 불리기도 하며, 성은 유(劉), 이름은 영(嬰)이다. 중국 전한의 선제(宣帝)의 현손이며 평제(平帝)의 황태자이다.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이 평제를 독살한 후, 왕망은 원제의 후손이 더 이상 없었고, 다른 제후왕들이 장성했는데 만약 그들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이 실각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태어난지 1년 밖에 안된 광척후 유현의 아들인 유영을 6년 3월 기축일(1일)에 황태자로 세운 뒤, 옛날 주나라 때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한 것을 본받아 유자(孺子)라 호칭했다. 그런 뒤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로 호칭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섭황제(攝皇帝)’로 호칭하게 하여 마침내 임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유자는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로 세우진 않았다. 마침내 왕망이 8년 11월에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웠고 유자는 정안공(定安公)으로 삼았는데, 왕망은 유자를 바보로 자라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지황(地皇) 4년(23년) 왕망의 패망 후 반란 세력이었던 경시제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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