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들에게 추대받으며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 한(漢)민족의 통합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한(漢)나라는 기원전 206년이 원년으로 그해 진왕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을 하고 4년후인 202년 고조5년에 황제에 오른 것이다.
이제 논공행상이 벌어지는데,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소하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리고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고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시 태연히 한중 진영에 가담하는 등 유방의 눈에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던 옹치를 맨 먼저 십방후(什方侯)로 삼았다. 이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누르고 반란하지 않게 하려는 장량의 계책으로, 다른 제후들에게는 '(유방이 그토록 미워하는) 옹치에게도 상이 주어졌으니 나에게도 제대로 된 은상이 내려지리라'라고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유방은 처음에는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으려 했지만, 유경(劉敬)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할 때의 이점을 말하고 장량도 찬동하자 장안에 즉시 행차하여 그곳을 수도에 정했다.
어느 날 유방이 가신들과 함께한 주석에서 "나는 천하를 잡고 항우는 천하를 잃은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고 이것에 대답해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폐하께선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하지만 항우는 인자하게 사람을 사랑했으나 폐하는 공적이 있으면 아낌없이 영지를 주어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었고 항우는 현명한 자를 시기하며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은상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잃은 이유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유방은 "귀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나는 장량 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 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 하느냐 하면, 한신 을 따를 수 없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아는데 항우는 단 한 사람, 범증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잡은 이유다."
라고 대답해 군신들이 감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방은 황제가 된 이후 본격적인 숙청작업을 시작하는데, 유방이 가장 경계했던 인물은 한신이었다. 기원전 196년, 한신은 소하의 계책으로 붙들려 처형되고 다른 제후들 역시 처형된다. 그리고 유씨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대해서 유방을 은혜를 모르는 사람으로 비난하고는 하는데, 과거 주나라가 분열되고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된 이유는 제후들이 주나라 못지 않게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한나라가 전한 후한 합해 400년간 지속된 것은 공신들을 적당히 걸러냈기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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