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한 고조 5년) 유방은 항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신, 팽월 등과 함께 연합하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초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유방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고 수비에 치중했다. 조급해진 유방이 장량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묻자 장량이 말했다. "초군이 망하려 하는데 한신과 팽월은 아직 나누어 받은 봉지가 없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군왕(君王)께서 천하를 그들과 함께 나누실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유방이 이 계책을 받아들여 초군을 물리치면 땅을 나눠주기로 약속한 후에야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움직였다.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가 출정하자 단번에 성부(城父)를 전멸시키고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 동남쪽)에 이르렀다. 상황이 불리한 것을 감지한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이 항우를 배반하고 연합군에 동참했다.
한군과 여러 제후의 군사들이 물밀듯이 진격해오자 항우의 군대는 해하에 방어벽을 구축했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식량마저 떨어진데다 겹겹이 포위되어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밤, 이렇게 대치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방에서 초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항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한군이 벌써 초나라 땅을 전부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이는 원래 한나라 병사들이 초나라 노래를 배워 초나라 사람처럼 가장한 것으로 일종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특히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데 깊은 밤에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듣는 이의 마음을 처량하게 만든다. 군사들이 이런 노래를 듣는다면 고향 및 가족 생각에 사기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패배를 직감한 항우는 근심에 휩싸여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그에게는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는데 몹시 총애해 늘 옆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항우에게는 또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駿馬)가 있어 늘 이 말을 타고 다녔다.
비분강개해진 항우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건만 시운이 불리하여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虞)여, 우여 내 그대를 어찌할꼬?"
항우가 여러 차례 노래를 부르니 미인도 따라 불렀고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자 옆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항우가 말을 타고 군영을 버리고 도망치자 그 뒤를 따르는 자가 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한군은 기장(騎將) 관영에게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했다. 항우가 회수(淮水)를 건너니 자신을 따르는 기병이 겨우 100여 명에 불과했다. 중간에 길을 잃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겨우 28기만 남았고 추격하는 한군 기병은 수천에 달했다.
이때 항우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일찍이 패배를 몰랐고 마침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 내 오늘 정녕코 결사의 각오로 통쾌히 싸워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기병을 넷으로 나눈 후 사방으로 향하며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적장의 목을 베었다. 이때 항우 혼자 죽인 한나라 병사들이 100여 명이 넘었다.
항우가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오강(烏江)을 건너려 했다. 이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는 항우에게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권토중래(捲土重來 한번 싸움에 패하였지만 다시 힘을 길러 쳐들어옴)할 것을 권했다.
"강동이 비록 땅은 작지만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니 그곳 또한 왕이 되실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얼른 건너십시오. 지금 신에게만 배가 있으니 한군이 쫓아온다 해도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항우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가서 무얼 하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 젊은이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강동 사람들을 대하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항우는 정장에게 자신의 애마를 맡기고는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 수백 명의 한군을 죽인 후 장렬히 전사했다.
항우가 죽자 초나라의 모든 지역이 한나라에 투항했으나 오직 노현(魯縣)만 항복하지 않았다. 이곳 백성들의 의도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려는 것임을 안 유방이 그 뜻을 갸륵히 여겨 항우의 머리를 가져다 보여주자 그제야 투항했다. 원래 회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해 이곳을 영지로 준 적이 있었다. 유방은 이에 대한 예우로 항우를 곡성(穀城)에 안장했다. 유방은 항씨 일족들을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항백은 후(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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