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로 즉위한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어느정도 나라가 안정이 되자 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유방이 가장 경계했던 상대는 한신이었다. 하지만 결국 소하의 계략으로 한신은 처형당하고 많은 공신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유씨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유방에게 가장 큰 위기는 바로 흉노와의 전투였는데, 기원전 200년, 흉노의 묵돌 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백등산(白登山)에서 묵돌 선우에게 포위되고 만다. 백등산 포위전으로 이로 인해 유방과 묵돌 선우는 흉노를 형, 한을 동생으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하고 매년 조공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한이 흉노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후 회남왕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된 유방은 기원전 195년 최후를 맞이하게된다. 죽기전 태후인 여치는 향후 누구를 승상(丞相)으로 세울지를 묻자 유방은 "소하에게 맡기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참이 좋으리라."라고 대답하고 거듭 몇 번을 묻는 여치에게 "그 다음은 왕릉이 좋겠지만, 왕릉은 너무 우직하니 진평을 보좌로 삼으면 되겠지만, 진평은 너무 두뇌가 명석하니 모두 맡기면 위험하다.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분명히 주발이리라."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은요?" 라고 더욱더 묻는 여치에게 "대체 너는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 그 다음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쏘아버렸다고 전한다.
유방이 죽자 태자 영이 혜제로 즉위한다. 하지만 실권은 모두 여태후의 일가인 여씨 일문이 쥐게 된다. 특히 여태후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막강한 권력과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도 있던 여걸이었다.
여치가 유방과 결혼할 당시 나이도 많고 처자식까지 딸린 유부남이었다. 이런 유방에게 시집을 가고, 유방에게 체포령이 떨어져 도망 다닐 때는 남편 대신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고 망(芒)․탕(碭) 소택지로 도망간 유방을 위해 어린 아이들을 안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거나 정보를 전달고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항우에게 포로로 잡혀 3년 10개월 동안 시아버지를 모시고 고생한 적도 있다. 여치는 유방을 황제로 만든 1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권력욕이 매우 강한 여성으로 이로 인해 한의 2대 황제인 혜제는 원래 성품도 나약해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해 보지도 못한다. 여치(여태후) 시기의 진짜 황제는 여태후였던 셈이다.
혜제가 즉위를 하고 실권을 쥔 여태후가 가장 먼저 한일은 척부인에 대한 보복이었다.
유방은 여러 여인이 있었는데 이중 척(戚) 부인을 가장 총애했다. 척 부인은 이를 이용해 유방을 따라 출정(出征)에 나설 때마다 밤낮으로 울고 불면서 여의를 태자로 삼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유방 역시 태자인 유영의 성격이 너무 유순해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격이나 외모에서 자신을 쏙 빼닮은 여의를 더 총애해 태자로 삼고 싶었다. 여기서 척부인의 비극이 시작된다.
당시 유영(혜제)는 태자가 된 이후 큰 허물이 없었다. 신료들도 반대하고 특히 여태후가 버티고 있어서 태자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방은 척부인과의 아들 여의가 10세 되던 해에 도성에서 가까운 조왕(趙王)에 봉하지만, 척부인은 태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유방이 죽자 척부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고 여후는 태후(太后)가 되는데 여태후는 척 부인과 조왕 여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척부인을 사람돼지(人彘)로 만들어 버렸고, 조왕 여의를 독살해 버렸다.
이런 어머니에게 화조차 내지 못했던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효혜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애초 여태후는 효제와 황후 사이에 후사가 없자 다른 사람이 낳은 자식을 데려다 기르면서 그 어미를 죽이고 태자로 삼게 했는데 바로 3대 황제인 한 소황제(漢 少皇帝, ? ~ 기원전 184년, 재위 : 기원전 188년 9월 - 기원전 184년 8월) 소제로 여태후는 소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정사에 관여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는 등 전횡을 일삼는다. 소제 시기가 본격적인 여씨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기원전 184년, 소제가 성장하면서 과거 진상을 듣고 보복할 것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데 이를 알게된 여태후는 대외적으로 중병이라 공표하곤 그를 유폐시킨 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시해해 버리고. 혜제(惠帝)와 후궁인 미인 주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소황제 유홍(漢 少皇帝 劉弘, ? ~ 기원전 180년)가 4대 황제로 등극한다. 물론 실재 권력은 여태후에게 있었다.
하지만, 여태후도 사람이었다. 기원전 180년 7월 중순 태후의 병세가 위독해졌고 결국 숨을 거두고 여씨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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