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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충절의 상징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은 왕권에 반대했던 신권주의자였다.

[들어가기전]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 요약 충청남도 출신 조선 전기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세종대왕 시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

역사/인물 2015.03.19

호해의 폭정, 진나라 멸망의 계기 진승과 오광의 난

[시대 상황] 시황제가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자, 벼슬아치들은 시황제의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태자 부소(太子扶蘇), 승상 이사나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차례로 암살해, 어리석은 2세 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서 삼아 폭정을 실시하자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다음 해에는 진승, 오광의 반란을 시작으로 진나라 전국이 소용돌이 친다.2세 황제 호해의 폭정, 진나라 멸망의 계기 진승·오광의 난(陳勝吳廣-亂). 1.반란의 배경진에 대한 반항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두 농민이었다. 그들은 모두 허난성(河南省) 출신인데, 특히 진승은 집안이 가난하여 고용살이를 하며 남의 땅을 경작하고 있었다. 당시 농민 사이에 토지를 잃은 사람과 대토지 소유자와의 계층분화(階層分化)가 ..

역사/중국 2015.03.18

조선초기 청백리 명재상 맹사성 (강호사시가 저자) 생애와 평가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조선초기 청백리이며 명재상이었던 맹사성 (강호사시가 저자)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맹사성(孟思誠, 1360년 8월 28일/음력 7월 17일 ~ 1438년 10월 22일/음력 10월 4일)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이다. 최영의 손녀 사위로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에 수록됐다. 1386년 고려 말기 문과..

역사/인물 2015.03.18

베트남 전쟁, 한국군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범죄 빈호아 학살 (Bình Hòa massacre)

[들어가기 전] 한국군은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생활필수품을 지원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며, 도로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대민 지원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대민 지원 사업의 빛을 바래게 하였다. 한국군은 작전 지역 안에서 수많은 민간인 살해와 가옥 파괴, 성폭력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난 한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 당시“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사과한 바 있다 베트남 전쟁, 한국의 해병대 (청룡부대)가 저지른 만행, 용서받지 못할 전쟁 범죄 빈호아 학살 (Bình Hòa massacre) 1.요약..

역사/세계사 2015.03.17

베트남 전쟁,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

[들어가기전: 요약] 퐁니 퐁넛 학살 사건(베트남어: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베트남 전쟁,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 미라이 학살이 미군에 의해 자행이 되었다면,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은 바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으로 실재로는 더 많은 ..

역사/세계사 2015.03.17

베트남 전쟁,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

[들어가기전:개요]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베트남 전쟁,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 虐殺, 베트남어: thảm sát Mỹ Lai) 1.사건 배경미국 육군 23 보병 사단, 11 여단, 20 보병 연대, 1 대대,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투입되었..

역사/세계사 2015.03.17

조선의 마지막 명재상 정조의 조력자 채제공 (蔡濟恭)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정조)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조선의 5대 명재상 다섯번째, 마지막 명재상 정조의 조력자 채제공(蔡濟恭) 1.출생 및 가계1720년 지중추부사 채응일의 아들로 충청남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

역사/인물 2015.03.16

평생 민생을 위해 살다간 정승 김육 (관사유감 저자)

조선의 명재상 네 번째, 평생 민생을 위해 살다간 정승, 관사유감 저자 김육 1.생애 요약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 판관 김비의 손자이자 강릉참봉 김흥우의 아들로 한성부 서부 마포면(麻浦面) 마포리(麻浦里) 외가에서 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인조 반정 직후 학행..

역사/인물 2015.03.16

광복 70주년, 친일파 대신 매국노, 민족반역자로 부릅시다.

올초 1월1일부터 1월 4일까지 일본 신정 연휴에 맞춰 오사카를 다녀왔었습니다. 그에 대해 간략히 몇가지 이야기를 블로그에 썼었습니다. 이번에는 오사카에서 A님께서 오랜만에 고국 한국에 오셨습니다. 몇일 저의 집에 묵었고, 어제 저녁 부산 친지댁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난 몇일 동안 A님께서 하신 말씀중 이 말은 반드시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는 말에 공감하며 몇자 적습니다. 광복 70주년 역사 바로세우기 첫번째, 친일파(親日派)라는 단어 대신 매국노(賣國奴) 혹은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라 확실히 부릅시다. 잠시 올초 1월1일 오사카에서 있었던 일부터 간략히 소개합니다. 그때 가볍게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A님과 B님과 같이 오사카 성 근처를 잠시 구경하고 저녁에 식당에서..

조선 명재상, 키작은 재상, 오리정승 문충 이원익(李元翼) 생애와 평가

이원익(李元翼, 리원익, 1547년 ~ 1634년)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조선의 명재상 세 번째 왕족출신 영의정, 키작은 재상, 오리정승으로 알려진 문충 이원익(李元翼) 생애와 평가 1. 출생 및 가계이원익..

역사/인물 201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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