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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주나라 전성기 성강의치 (成康之治)

중국 최초의 황금시대 주나라 전성기 성강의치 (成康之治 주 성왕, 주 강왕 시기) 1. 요약성강의 치(成康之治)는 중국 주나라의 주무왕의 뒤를 이은 주나라 2대왕 성왕과 3대왕 강왕의 통치 기간(기원전 1043년 ~ 기원전 996년경)으로 사서에 '성강의 치세에 천하가 안정되어 40여년간 형벌을 행하지 않았다(成康之際,天下安寧,刑錯四十余年不用)'라고 기록된 안정된 치세였다고 전해진다. 2.제 2대 주 성왕 송 (成王 誦): 기원전 1043년 ~ 기원전 1021년)서주 성왕(西周 成王), 성은 희(姬) 휘는 송(誦) 성왕은 시호가 아니고 생전의 칭호. 남동생은 진의 시조인 당숙우(唐叔虞;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이복형제). 즉위 했을 때는 아직 어렸으므로 실제 정무는 어머니 읍강, 숙부 주공 단(周公..

역사/중국 2015.02.17

주나라 최초의 반란 삼감의 난(三監-亂)- 관채의 난, 무경의 난

주나라 최초의 반란 삼감의 난(三監-亂) - 관채의 난, 무경의 난 요약 정리 1.개요주나라 초기에 상나라의 유민을 관할한 무경 녹보와 녹보의 감시 보좌를 맡은 삼감(三監) 관숙 선, 채숙 도 등이 서주 성왕을 보좌한 주공 단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관채의 난(管蔡-亂), 무경의 난(武庚-亂)이라고도 한다. 2.전개과정《사기》 관채세가와 《상서대전》 금등조며, 사기의 노주공세가, 송미자세가, 위강숙세가 등에 나타난 삼감이 난을 정리해 본다(위키백과 참조)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 제신의 아들 무경 녹보(祿父)에게 상나라의 유민들을 맡겨 상나라 왕실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게 해주었는데 이는 상나라를 제후국으로 계속 유지해준다는 의미다. 하여 상나는 주나라가 중원을 지배했을 때 여전히 존속을 하고 있었다. 당..

역사/중국 2015.02.17

한국사 연표 (고대~현대 요약)

한국사 연표 (고대부터 1995년까지 연도별 요약 정리)[기원전]10000년 중석기문화 형성. 공주 석장리유적의 단구(段丘) 제1문화층과 단구 제3문화층. 욕지도(欲知島)유적지 등의 세석기 제작.6000년 전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Ⅰ류 제작사용. 부산 동삼동하층 형성.5000년 서울 암사동유적 형성.4000년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하층의 제1기 및 제2기 문화층, 온천 궁산리유적 하층 문화 등 형성.3500년 중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Ⅱ류.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제3˙4˙5기 문화층, 평양 금탄리유적 제1˙2문화층 등 형성. 부산 동삼동유적 4층 두도기 형성.3000년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제6문화층, 평양 금탄리유적 제3문화층, 회령 오동유적 제1˙2문화층 등 형성.2333..

삼국유사 저자 보각국사 일연 스님 왜 삼국유사를 썼을까

일연(一然, 본명 김견명(金見明), 1206년 ~ 1289년) 속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속명은 견명(見明)이며,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한다. 1206년 무신정권 시대에 경상북도 경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214년(고려 고종 1년) 9세 때 전남 광두의 무등산 자략에 있는 해양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4세 되던 1219년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陳田寺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가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정식으로 중이 되었다. 진전사는 선종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홉 선..

역사/인물 2015.02.15

주왕조의 건립자 주무왕 (서주 무왕 희발 西周 武王 姬發) 설명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周)의 초대 군주로서,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인데, 둘째였으므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주무왕의 생몰년은 역사적인 고증이 없는 것으로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93세까지 살았다고 구전되고 있다. 주 무왕은 주 문왕(周文王)의 차남으로 형 읍고(邑考)가 상조(商朝) 주왕(紂王)에게 참살당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아버지 서백창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商)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강태공 같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주나라는 강대해졌다. 주문왕 통치 50년이란 세월동안, 상조를 토벌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했다. 내정을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온갖 정력을 몰부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

역사/중국 2015.02.15

8백년 주 천하의 기틀 다진 주 문왕 (서백 창)

주 문왕 희창(周 文王 姬昌,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11세기?)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주나라(周)의 창건자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서백(西伯)은 그의 직위로 흔희 서백 창이라고 부른다. 주나라는 시조 후직의 11대인 고공단보 때에 이르러 기산에 도읍을 정하고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주라고 불렀다. 고공단보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백, 우중, 계력이었다. 막내 계력이 창(주문왕)을 낳았는데, 보통 사람과 확연히 구별되는 인품과 지혜를 가졌다.당시 주나라는 장자 상속의 원칙이 있었다. 태백과 우중은 아버지 고공단보의 뜻을 알고 왕위를 포기하고 형만 땅으로 떠나 후일 오'나라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계력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바로 공계이다. 공계가..

역사/중국 2015.02.15

주나라 태공(太公) 고공단보

경절이 사망한 후 7대가 지나 고공단보(古公但父)가 즉위했다. 고공단보는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이어 덕을 쌓고 의(義)를 행했다. 그러자 국인(國人)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흉노의 전신에 해당하는 훈육(薰育)족이 고공단보를 공격하며 재물을 요구하자 고공단보는 그들에게 재물을 주었다. 나중에 또 다시 공격해 땅과 백성들을 요구하자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며 반격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백성들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자신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오. 지금 융적(戎狄 이민족)이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에게 땅과 백성이 있기 때문인데 백성이 내게 속하든 그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를 위해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 가며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나..

역사/중국 2015.02.15

조선시대 붕당 정치는 당쟁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양당 정치의 시작이다.

[들어가기전] 우리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붕당(朋黨)을 당쟁(黨爭:당파 싸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이 우리 한민족에게 심어준 왜곡된 말로, 당쟁이 아닌 붕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그리고, 조선시대 붕당은 조선만의 문제도 아니었으며, 18세기까지만해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절대 낙후되지 않았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조선 붕당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는 당쟁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민주적인 양당 정치의 시작이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 설명] *참고 : 대부분 위키백과를 인용해 정리했습니다. 1.붕당 설명..

시무 28조 저자 고려 초기 재상 최승로 (崔承老) 생애, 평가와 한계

[요약] 최승로(崔承老, 927년 ~ 989년) 고려 초의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정(文貞), 신라 말기 그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의 증손자, 아버지는 신라 6두품 출신 최은함(崔殷含) 성종(成宗)에게 시무 28조를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바친 시무 28조는 대부분 수용되어 고려의 정치제도와 지방통치 등 국정 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었다. 시무 28조 저자 고려 초기 재상 최승로 (崔承老) 생애와 평가 (최승로의 개혁은 신라 출신 호족들의 혜택을 주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1.최승로의 생애 초기신라 말기인 927년 신라 조정의 관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태조 18년(935년)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최은함 역시 고려로 귀했다. 고려사에는 최은함의 벼슬을 원보(元甫..

역사/인물 2015.02.11

대통령 각하 호칭 알고보니 일본강점기 잔재였다. 대통령 님이 옳다.

요즘 이완구 국무총리 내정자의 각종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과연 이런 인물이 국무총리가 되어야 하는가? 그나마 박근혜 정부에서는 나은 인물이다(이런~)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문 듯 얼마전 이완구 내정자가 박근혜 대통령 ‘각하’라는 호칭으로 비난을 받았었는데, 2주전 JTBC뉴스룸에서 이걸 지적한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각하’라는 호칭이 얼마나 무지하고 한심한 것인지 소개한다.(자료 및 캡쳐사진 출처 소유권 : JTBC) 대통령 각하(閣下, 脚下) 호칭 알고보니 일본강점기 잔재였다. 대통령 님이 올바른 표현 [박근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자는 이완구 어느 나라 사람인가!] ‘각하’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으로 6.25전쟁 당시 전단에서 이승만 대통령 각하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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