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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만해 한용운(韓龍雲) – 어디라도, 수의 비밀, 버리지 아니하면, 군말

올드코난 2010. 7. 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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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韓龍雲)


어디라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려 줍니다.

  근심을 잊을까 하고 꽃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 사이를 스쳐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 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부끄럼을 살뜰히도

 덮어 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찿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맟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수의 비밀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포도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 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런 때에는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다가 잘 때에,

  외로운 등잔불은 각근(恪勤)  파수꾼처럼 온  밤을 지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일생의 등잔불이 되어서

  당신의 백년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여러가지 글을 볼 때에, 내가 요구만 하면,

  글을 좋은 이야기도 하고, 맑은 노래도 부르고, 엄숙한 교훈도 줍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복종의 백과  전서가 되어서 

당신의 요구를 수응하겠습니다.

  나는 거울에 대하여 당신의 키스를 기다리는 입술을 볼 때에,

속임이 없는 거울은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거울

도 찡그립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마음의 거울이 되어서,

속임없는 당신의 고락을 같이 하겠습니다.

 

 

 군 말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

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

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니찌의 님은 이탈리아이다.

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메는 어
(
)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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