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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희진 作 지상의 소나무는, 골과 향수, 회복기

올드코난 2010. 7. 2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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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詩

지상의 소나무는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인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골과 향수

 

 

 

  어머니 자궁속에 태아와 같이

  밀폐된 관 속에 그녀는 황골로 불만이 없었다.

  그 볼을 곱게 물들이던 피 한 방울, 머리칼 하나,

  살 한 점 안 남기고. 남 몰래 사랑으로

  빛났을 눈동자, 아 한 번도 사나이 가슴을

  대 본 일이 없었기에 수밀도처럼 익었을

  젖가슴의 심장이나마 남은들 어떠리오. 허나

  조찰히 골만 누웠네요. 땅 속에 자라난

  무슨 기묘한 식물과도 같이. 아름다운 변신일까.

  그녀가 묻힌지 십 오년 만에 발굴된 무덤,

  이 제껴진 관 속에 쏟아지는 햇빛의 조롱이여.

  무덤 파는 일군의 굵직한 손가락이 골에 닿자 마자

  마디 마디 으러지는 그것은 가루, 보니 두골이

  치워진 자리엔 반쯤 담겨진 향수병 하나.

 

 

  향수

 

  고승의 골회에선 영롱한 사리가 나온다지만

  그녀의 고운 마음, 향수로 화함인가... 피도 힘줄도

  내장도 살도 그 몸을 감았던 베옷과 함께

  삭아서 검은 티끌 위에 호올로 숨 쉬는 향수병

  투명한 그 속에 반쯤 담기어, 상기 은밀히 떨고 있는

  향수의 내력을 어느 시인이 풀이할 수 있으리오.

  별에 흘렸던 그녀의 눈물, 잠결에 새어난

  한숨이 모여 향기로운 이슬다이 어리운 것일까.

  이젠 영원히 새어날 수도 없이,유리의 그릇 속에

  죽음을 뚫고 고여진 사랑. 허나 이 그지없이

  고귀한 향수에게 햇빛은 잔인해라, 차라리 흙을

  그 팍팍한 흙을 덮어라요. 다시 십 오 년이 지나간 뒤

  이곳에 길이 나고 집들이 선들, 그녀의 고혼이야

  깊고 어둔 흙 속에 보석으로 오롯이 맺히리니.

 

 

     회복기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

  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5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쌍인 독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이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혀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 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 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은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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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1931년 경기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예술"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생에의 외경을

바탕으로 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

'월탄문학상'을 수상(1976)했으며 시집으로는 "실내악" "청동시대"

"미소하는 침묵" "빛과 어둠의 사이" "서울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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