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YH 무역 사건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내용과 평가

올드코난 2015. 11. 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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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였던 YH 무역 회사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해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 사이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한 사건으로 이 사건의 영향으로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 말인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독재에 굴하지 않는 명언으로 남아있다.


어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 YH 무역사건 당사자였던 여공들이 분향소를 참배했다. 36년 전 부당해고를 외치던 당시 20대 여공들은 이제는 할머니 되었다. YH 사건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리해 본다.



YH 무역 사건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YH 貿易籠城事件) 전말과 평가


1.사건발생 이유

1970년대 초 한국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당시 종업원 4000명, 수출순위 15위였던 대기업이었다. 잘나가던 YH무역이 위기에 빠진 것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 둔화와 사업주(장용호)의 회사자금유용으로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원들에 대한 착취가 심했던 기업이었던 YH무역은 일당을 220원 지불했는데 이는 당시 커피 한잔 값이었다. 특히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1979년 4월 폐업을 선언한 뒤, 8월 6일 2차 폐업을 공고한다.


2. 장기농성 돌입

YH무역 노조는 1975년 설립되어 있었다. 회사가 폐업을 공고한 이후 노조는 회사정상화 방안을 채택, YH무역을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다.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시작하는 한편, 회사 측과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주), 관계기관에 회사 정상화를 호소한다 하지만 사측은 이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기숙사·식당까지 폐쇄를 하게 된다. 4월 13일부터 장기농성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주간 조업, 야간 농성이 계속되되는데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2차 폐업 공고를 내고, 7일에는 기숙사 식당까지 폐쇄하고, 퇴직금·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고 공고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한다.



3. 신민당 당사 농성

8월 9일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YH무역 여성노동자 187명은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다음날 8월 10일 노동자들은 긴급결사총회를 열어 YH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할 것과 장용호 회장을 소환할 것, 기업 정상화와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등을 결의하며 농성을 계속한다.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은 이들 여성 노동자들 위로하면서 지켜주겠다며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이틀동안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로 차고 따귀를 치면서 이들에게 경고를 하며 내쳤다.


4.무지비한 진압

8월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린다. 당시 이순구 서울시경 경무국장이 신민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고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행해 호통쳤다.

그리고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철병력 1천~2천여명을 투입한다. 신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20여분만에 강제해산되고 연행되었다.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노동자들 중 김경숙(당시 21세)이 추락해 사망하고 김영삼은 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 경찰을 제지하던 172명의 여성 근로자와 신민당 당원 26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5.사건의 여파와 평가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서 이 회사 노조간부를 구속하고, 배후 조종자로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인명진(印明鎭) 목사 등 7명도 구속한다. 이 사건은 1970년대의 일대 여성 근로자쟁의사건으로서, 사건 직후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 반유신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어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사건 직후 폭력 진압과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이로 인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이 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사건의 여파는 계속 확대되어 기독교·학생·청년세력 들의 반유신 연대투쟁을 촉발하는 등 1970년대 말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6. 참고: YH무역의 사장 장용호

YH무역의 사장 장용호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절친으로 알려졌고 육영수 여사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도피했는데 미국에 대형빌딩을 포함하여 적어도 3개 이상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으로 빼돌린 금액은 당시 돈으로 15억으로 추정된다. 장용호의 자녀들은 하버드와 스탠포드 등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리고 장용호는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하는데 그때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시기였다. 뉴욕한인회장으로써 청와대에서 김영삼을 만나기도 했다.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영삼이 자신을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라 한 점에 대하여 항의하고 김영삼이 그에 대해 사과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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