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 경인선 설명] 경인선(京仁線)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로구의 구로역과 인천광역시 중구의 인천역을 잇는 총 연장 27 km의 철도 노선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인 기록상 최초의 철도로[1][2], 1897년 3월 22일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공하여 1899년 9월 18일에 일부 구간이 개통되었다. 1974년 8월 15일부터 전 구간을 수도권 전철이 운행하고 있다. 현재 서울과 인천시와 부천시를 연결하고 연선의 교통량 절반 이상을 분담하고 있다. 경원선 용산역 ~ 광운대역 구간과 함께 철저하게 도시철도화되고 있는 노선이다.
1900년 11월 12일 경인선 전구간 개통식, 조선 근대화의 상징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식민화의 시작이었다. 한민족의 한이 서린 경인선에 대해 알아 본다. (JTBC뉴스룸 참고)
1.철도 건설의 필요성
열강들의 틈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해 갔던 조선은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 한양(서울)은 한강을 통한 바닷길로 물자를 수송했는데, 개화와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서울을 항구과 직접 연결해주는 새로운 대량수송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2.미국이 시작한 경인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되면서 서울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철도가 구상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재정도 열악했지만 독자적으로 철도를 부설할만한 기술력도 능력도 없었다. 마침 경인선 철도 부설에 관심이 있던 미국 정부가 나선다. 1883년 6월 23일 독변교섭통상사무 민영목을 통해서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을 허가받고, 1887년 2월 9일에는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E. Frazar)를 통해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내고, 이후 1891년 3월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을 시켜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협상한다.
모스는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1894년 8월 무단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고, 이는 조선 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으므로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직후의 삼국간섭으로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1896년 아관파천 50일 만인 3월 29일 철도부설권은 모스에게 넘어갔다. 이는 철도에 대한 최초의 특허권 부여이자, 미국이 조선정부로부터 최초로 이권을 양도받은 사건이기도 하다.
3. 일본이 완성한 경인선
한국정부가 모스와 체결한 '경인철도특허조관'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에 기공, 그 후 3년 안에 준공하며, 이를 위반할 시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경인가도상의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기공식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되고, 1898년 5월 10일 공사 중인 경인철도가 170만 2452원 75전 (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된다.
그리도 다음해 1899년 9월 18일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는데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1900년 7월 8일에는 노선이 노량진역에서 경성역까지 연장되었고, 그리고 1900년 11월 12일 경성역에서 경인철도 완전개통식이 진행되었다.
노량진역에서 한강철교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철도 시발지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99년에 제작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 중 노량진역 스탬프에 새겨져 있다. 도원역 부근에도 경인선 기공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4.완성이후
1906년 2월 10일에는 우각동역이 폐지되었고, 1908년 12월에 선로의 개량으로 당시 축현역이 이설되었다. 1928년부터 복선화의 계획은 있었지만 자금난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5.광복후 복선화
1963년 11월 복선화가 시작되고 1965년 9월 18일 완공되는데 경인선은 경부선에 이어 두 번째로 복선화가 완료된 노선이며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복선화시킨 노선이라는 의미가 있다.
6.현대 전철화
1974년 8월 15일에 전 구간이 전철화되어 경원선 성북역(현 광운대역)과 인천역간을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하기 시작하고 일반 열차의 운행은 중지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통해 서울의 도심으로 바로 연결되기에 서울/인천 간 교통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7.한민족의 한이 맺힌 경인선
이제부터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사람들의 교통 수단인 경인선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경인선 완성 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그리고 의주를 연결한 경의선을 건설하는 와중에도 많은 백성들을 착취했지만, 완공된 이후 조선의 쌀은 물론, 조선의 자원들이 경부선, 경인선, 경의선을 거치고 부산이나 인천항의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고종이 생각했던 경인선의 최초 계획은 조선을 위함이었지만, 미국이 경인선 건설을 일본에게 넘겨버린 순간 경인선은 일본을 위한 철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첫 삽은 미국이 뜨고, 철도는 일본이 챙겼다.
그리고 조선은 착취를 당했고, 경인선 완공 10년후 나라마저 뺏겨 버렸다.
경인선은 근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과 망국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내가 중학교에 다닐 시절인 30년전 OOO 선생은 경인선을 근대화의 시작으로 아주 높이 치켜세웠었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의 위대성을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었다.
그때 그 선생은 단 한번도 경인선을 만드는 과정에 백성들이 수탈되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경부선을 만들 당시 근로자들의 희생을 당했다는 말도 쏙 뺐다.
훗날 알게되었지만, 그 선생은 친일 후손이었다.
친일파들에게 경인선은 아주 큰 자랑이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경인선이 서울과 인천 교통에 중요한 교통로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우리 선조들이 착취를 를 당하고 고통을 겪었는지 한번쯤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최근 국정교과서서 문제로 사회적인 갈등이 조성되고 있다. 이는 이념논쟁이 아니다.
상식과 비상식, 진짜 애국과 가짜애국(친일매국노)의 다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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