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월10일은 조선총독부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강요한 창씨개명을 선포한 날이다. 민족의 비극이며 잊지 말아야 할 창씨개명에 대해 정리해 본다. (JTBC 위키백과 참조)
1939년 11월 10일 창씨개명(創氏改名) 공포, 일본이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자발적인 식민지인으로 만들기 위한 창씨개명에 대해 알아본다.
1.창씨개명(創氏改名) 개요
일본식 성명 강요(日本式姓名强要) 또는 창씨개명(創氏改名 そうしかいめい 통용: 소시 카이메이)은 1940년 2월부터 1945년 8월 광복 직전까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을 쓰도록 강요한 것을 뜻한다. 창씨(創氏)란 일본식으로 씨(氏)를 만드는 것이고 개명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창씨(創氏)는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으로 지원병 제도,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 조선어 사용 금지와 함께 한민족 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2.의미
창씨개명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주도한 조선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하나였다. 미나미의 조선총독부는 부계 혈통에 기초한 조선의 종족집단(종중)과 여자가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성(姓)을 유지하는 조선의 가족 제도가 황민화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에게 모든 가족이 호주(戶主)의 씨(氏)를 쓰는 일본식 이에(家)제도를 따르게 함으로써 일왕(日王)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계에 적합하도록 조선의 가족제도를 개조한다는 목적 아래 강요된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다
3.창씨개명 직전까지 상황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고 1911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금지했었다. 이는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부 일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자, 한·일 민족의 차별화에 바탕을 둔 지배질서 유지를 통치목표로 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1911년 11월 1일 총독부령 제124호)을 시행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성명을 호적에 올릴 수 없었고, 조선인의 개명을 어렵게 하며 이미 개명한 사람도 본래 성명으로 되돌리도록 하였다. 다시말해,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의 식민지 노비로만 여겼던 것이며, 1939년까지 창씨개명을 했다면 이는 진심으로 일본에게 충성을 했고 조선인이 되기를 거부한 진짜 매국노로 여겨도 될 것이다. 일제의 런 정책기조가 바뀐 것은 중일전쟁으로 인해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부족한 병력 수급 등을 위해 조선인들을 자발적으로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내선일체가 강조되면서부터이다.
4.창씨개명 시행령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제 령 제19호)을 개정하여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한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식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창씨개명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호주가 새로운 일본식 성씨(姓氏)를 정하여 신고할 것, 조선에서도 서양자(壻養子)를 인정하며, 서양자는 처가의 성씨를 따를 것, 이성(異姓) 양자를 인정하며, 양자는 양가의 성씨를 따른다 등이다.
5. 강제 시행
창씨개명의 핵심은 일본식 창씨(創氏)에 있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이 원해서 실시하는 것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총독부는 강제, 법의 수정, 유명인의 동원 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마감까지 창씨율을 10배 이상인 79.3%로 끌어올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주요 방식]
-창씨(創氏)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학교 차원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는 폐교한다.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의 창씨를 강제한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조치를 취한다. 다만, 일본식 씨명으로 창씨개명한 후에는 복직할 수 있다.
-행정기관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 사찰을 철저히 한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식량 및 물자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철도 수송화물의 명패에 조선식 씨명이 쓰여진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조치한다.
-창씨개명령 제정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일본식 씨명으로 출생신고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신고를 계속 반려하여 자녀와 그 부모가 창씨하도록 강제한다.
6. 조선인들의 반발
창씨개명 시행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당연히 조선인들의 반발은 거셌고, 친일파들조차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창씨(創氏)의 강압 속에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당시 국내에 있던 조선인 주요 인사들 가운데에서는 여운형, 안재홍, 김병로, 여운홍, 김성수, 송진우, 윤보선, 백관수, 장덕수, 박헌영, 방응모 등이 창씨를 하지 않았다.
7. 일본인들의 반발 이유
일본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컸는데, 이는 조선인들과는 다른 이유에서다. 조선총독부관리 출신들로 조직된 총독부 후원단체인 '중앙조선협회'가 반대했고 조선총독부 내부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국을 중심으로 반대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과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인은 조선인을 하층민으로 보고 있었기에 자신들과 같은 일본인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괘씸하지 않은가)
조선과 일본의 반발에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선전했지만, 정작 일본의회의 대정부질문에서는 '조선에 본적을 둔 조선인은 일본으로 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일본인도 조선으로 본적을 옮길 수 없다'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분리 차별 정책은 계속될 것임을 드러냈다.
8. 지식인들의 창씨개명
1940년 1월 4일,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은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형식의 창씨개명 담화를 발표하면서, 이는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일 뿐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미나미의 담화에 친일파들조차 믿지 않았다고 한다.
(1) 춘원 이광수
1939년 12월 12일, 경성일보를 통해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고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한 춘원 이광수는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 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이다."라며 창씨개명 거부 이후의 불이익을 예상하고 있었다.
(2) 윤치호
일본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라며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에 가해질 불이익을 염려했다.
9.창씨개명의 사례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창씨(創氏)를 왜식(倭式)으로 하지 않고 대개 자기의 관향(안동 권씨는 안동이나 안동의 별칭인 영가(永嘉), 김해 김씨는 김해)을 땄다. 일부는 원래의 성씨를 파자(예. 朴 = 木+卜)하기도 하고 전주 이씨의 경우는 조선 왕실의 일가라 하여 대개 국본(國本), 궁본(宮本), 조본(朝本) 등으로 창씨하거나, 일부는 본관의 지명을 따서 '전주'로 창씨하기도 했다.
창씨에 반대하던 이들 중에는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일본식 발음인 '덴노 헤이까'와 발음이 비슷한 '덴노 헤이까'(田農炳下, 田農昞夏)로 개명해 일왕(日王)을 조롱하거나, 산천초목(山川草木),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에하라 노하라) 등으로 장난삼아 짓거나, 성(姓)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 해서 '이누코'(犬子 いぬこ)라고 창씨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시 조선 총독의 이름 미나미 지로("미나미 가의 둘째 아들"라는 뜻)라는 것에 착안해서 '미나미 다로'(南太郞→미나미 가의 큰 아들)로 이름을 바꾸어 창씨개명을 강행한 미나미 지로 총독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한 친일매국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이동인: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가운데 창씨개명한 사람 제1호(1880년 10월) - 아사노 도진(淺野東仁)
(2) 송병준: 정미칠적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사람 제1호.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
(3) 김석원: 일본군 대대장 출신으로, 중일전쟁 참전. -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
(4)정일권: 전 국무총리,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 -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
(5)김석범: 2대 해병대 사령관, 만주군 장교 출신. - 카네야마 쇼우(金山照)
(6)노덕술: 경찰, 독립지사를 검거하고 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10. 폐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의 조선 성명 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 군정법령 제122호)이 발효되면서 창씨(創氏)한 성씨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개명했던 한국인들은 본래의 이름을 회복했다.
11.올드코난의 생각
창씨개명은 1940년부터 공식적으로는 1946년까지 시행되었다. 고작 6년 밖에 되지 않은 짦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 6년이라는 기간동안 공식적으로는 한국인의 고유한 성과 이름을 잃어버렸다. 친일파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름이 일본인들과 같다 여겨 기뻤겠지만, 한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았던 대다수 조선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치욕의 순간이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창씨개명 같은 이름을 가장 먼저 바꾸는 자들은 이광수, 윤치호 같은 대부분 지식인들이었다. 배운 것이 많으면 현명해져야 하는데, 이들은 비겁함을 먼저 배웠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은 이후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하도록 독려하고, 심지어는 중국과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을 위해 싸우자고 외치기까지했다.
창씨개명은 일본인들과 이름만 비슷했을뿐 실재로는 일본이 조선을 이용하기 위한 강제적이고 비열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친일매국노들조차 일본인들과 동격으로 보지 않았다. 친일파들이 일본에게 대우를 받은 것은 이용가치가 있었기때문이었을 뿐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자발적으로 충성을 유도해 전선으로 내몰기 위한 세계 역사에 남을 만행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다.
물론, 마사오 같은 자에게는 영광이었겠지만.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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