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반독재 민주 혁명 4·19 혁명 평가 (419혁명 원인, 의의)

올드코난 2016. 4. 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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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四一九革命)은 제1공화국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자행된 부정선거에 김주열 학생의 희생이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의 주도해 발생한 민주 혁명이다.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하고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는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리해 본다.

1960년 4월19일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4·19 혁명, 발발이유와 평가 의미, 현대의 교훈.


1.배경

1960년 1월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 판정을 받고 하와이 병원으로 급히 갔지만 선거 한달 전인 2월 15일 신병 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사망한다. 결국 대통령은 이승만 단독 후보가 된다. 문제는 부통령 후보였다. 당시는 부통령제가 있었는데, 민주당의 후보는 장면이었고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최악의 부정선거를 하게 된다. 공무원과 경찰을 총동원한 이승만의 선거 운동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한다.


2. 2.28 대구 학생의거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3. 3·15 의거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면서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하자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달아오르고 시위는 격렬해진다.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된다.

이를 3·15 의거라고 하는데 이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되었고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4. 제2차 마산 시위

4월 11일 마산시위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


5.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


6. 4.19.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지만 곡사포는 곧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군인들이 덮쳐서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이승만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기붕은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육군부대로 피신한 상태였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한 무장시위대원들과 경찰들간의 총격전도 벌어졌다.

다행스런 것은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최경록의 만류로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해 사태를 수습했다는 점이다. 군의 중립 의사를 언론에 밝히고 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유혈사태 방지 및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해 대규모 희생을 막았다.


7. 이승만 하야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다시 커지기 시작하고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한다. 4월 25일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할 것을 권유하고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며 사실상 하야를 거부한다.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공식 발표한다. 이승만 독재가 끝난 것이다.

참고: 이승만 하야 발표문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8. 올드코난의 4.19 혁명 평가

이승만 추종자들은 여전히 4.19 혁명을 부정적으로 본다. 윤치영 같은 이는 4.19사태라고 불렀고 극우주의자들은 북한의 간첩이 일으킨 소요사태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지만, 4.19. 혁명은 대한민국 건국초기 이승만이라고 하는 독재자를 민중의 힘으로 내친 혁명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문맹인들이 많았다. 기성세대들 대다수는 일제강점이 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세대들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을 못했고 배움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은 40년대 이후 출생자들로 일제강점기는 너무 어려 그 시대를 모르는 대신 광복후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배우기 시작한 세대들이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당시 학생신분으로 4.19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이후 이들이 바로 한국의 주류 세대가 되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이끈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2016년 현재 이들은 모두 70대 전후의 노인세대들이 되어 4.19혁명 당시의 그 정신들을 잃어 버리고 이승만을 국부라 여기거나 박정희 우상에 대한 동조와 박정희 딸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여겨진다.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4.19혁명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보면, 이승만을 포함한 당시 권력층들의 부정부패도 있었지만, 이를 지지한 자들이 많았다는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게 혜택을 받아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 영웅이라는 선전에 속아 무조건 지지를 한 사람들이 당시에도 많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런 맹목적인 지지가 이승만 독재를 연장시켰고, 이에 많은 국민들의 고통을 받아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4.19혁명의 교훈은 절대 권력과 독재자를 찬양하지도 말고, 동조하지도 말고 권력자를 늘 경계해야한다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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