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대통령 직선제 개헌 6.29 선언 전문 내용 평가

올드코난 2016. 6. 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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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六二九宣言)은 1987년 6월 항쟁에 굴복해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며 여당의 실질적인 대선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6월 29일 발표해 일반적으로 6.29 선언으로 부른다. 배경과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본다.

국민들이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6.29 선언 전문 내용, 배경, 평가


1.배경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전두환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어 대통령에 취임하는데, 체육관에서 당선되어 체육관 대통령이라 불린다. 전두환 제5공화국의 헌법은 간접 선거를 통한 7년 단임제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왕적 대통령으로 이에 대해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진다.

특히 80년대 들어서는 고학력자들이 늘어가고,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다. 특히 대통령 선거해인 1987년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게 된다.


2.박종철, 이한열 열사 사망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이에 대학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전두환 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6월에 들어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를 간접선거로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하자, 전국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이때 6월 9일 연세대학교 재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고 사망하고 만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6월항쟁이 시작된다.


3. 6.29 선언 내용

6월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노태우는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수횽한다는 6·29 선언을 발표한다. 5공화국 내각제 헌법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의 증언에 따르면, 6·29 선언문 초안은 박철언의 주도하에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팀이 참여했다고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노태우의 6.29 선언에 여당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고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6월 항쟁이 6.29 선언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4. 헌법개정

6·29 선언으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9차 개정헌법이 발의된다. 제9차 개정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총 유권자의 78.2%에 해당하는 20,038,672명이 국민 투표에 참여 이 중 93.1%가 찬성해 수립되었다.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 진선제 선거가 실시된다.


5. 평가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결정되었다. 이는 박정희 유신이후 잃어버렸던 대통령은 국민이 뽑는다는 당연한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여기에 야당 의원들이 역할이 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주역은 국민이고 국민들 중에서도 당시 대학생과 근로자들이었다. 국민들이 해낸 위대한 민주주주의 승리였다.

아쉬운 것은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해낸 직선제를 당시 야권 후보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가 승리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는 점이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5년후 1993년에는 김영삼이 1998년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는데, 만일 1987년 대선에서 단일화만 이루었어도 최소 5년은 일찍 민주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 점에 대해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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