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 이한열 사망 사건

올드코난 2016. 6. 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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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던 2가지 사건이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李韓烈) 최루탄 사망 사건이었다. 이한열 열사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1. 초기 생애

이한열(李韓烈, 1966년 8월 29일 ~ 1987년 7월 5일생)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이병렬과 배은심 부부의 2남 3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날 때 어머니는 동자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태몽을 꿨다고 전한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에서 지냈고 광주 동산국민학교와 동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을 결심하게 됐다고 전한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고 재수를 한다. 1년간 종로학원을 다닌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했다.


2. 억울한 죽음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았다. 전경들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나오고는 했었다. 최루탄으로 머리를 맞은 이한열은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사망했다. 당시 나이 22살이었다.


3. 장례식

19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신촌로터리, 서울시청 앞,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했고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 정도로 예측된다. 신촌에 이한열 기념관이 세워졌는데, 유품 중에 그의 신발이 있다. 이한열이 쓰러진 날 한 여학생이 주워 병원의 어머니께 건넸던 것이다. 나아서 집에 가려면 운동화가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4. 6.29.선언의 주역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 정태원이 촬영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만행을 알리게 된다. 또 대낮에 한 젊은 청년의 죽음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전두환 독재 정권의 실상을 알린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대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 일명 넥타이 부대들도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전국민들이 들고 일어서자 결국 당시 전두환의 후계자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이한열 열사가 죽음으로 남긴 민주주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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