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자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생애 평가

올드코난 2016. 10. 2. 15:35
반응형

미국 3번째 대통령(재임 1801년 ~ 1809년)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미국 공화주의의 이상을 전파했고 존경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다. 설명해 본다.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자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출생과 가계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 버지니아 주 저명한 가문에서 여덟 명 중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제인 랜돌프로 농장주이자 선주인 이스암 랜돌프의 딸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외할아버지인 이스암 랜돌프는 사촌으로는 페이튼 랜돌프가 있었고 이스암 랜돌프의 5촌 조카로는 훗날 제퍼슨의 후임 국무장관이 된 에드먼드 랜돌프가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아버지 피터 제퍼슨은 알버마를 군의(Albemarle County, 셰드웰(Shadwell)) 대농장주이자 측량기사였고 제퍼슨은 웨일스 사람의 후손이었다. 1745년 피터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랜돌프 대령이 죽자, 피터 제퍼슨은 랜돌프의 유언 집행자로서 터카호(Tuckahoe)에 있던 그의 토지와 그의 어린 아들인 토머스 만 랜돌프의 양육도 맡게 되었다. 그 해에 제퍼슨 일가는 다시 알버마를로 돌아가기 전까지 7년 동안 살 터카호로 이주하였고 얼마 안 되어, 피터 제퍼슨은 터카호 군의 군수로 임명되고 피터 제퍼슨은 치안판사와 버지니아 주 의원을 지내는 등 많은 요직에서 활약한다. 이런 피터 제퍼스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제퍼스은 어린 시절부터 폭 넓은 교육의 기회를 갖게 된다.


2. 어린 시절

토마스 제퍼슨은 1752년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 윌리엄 더글라스가 운영하던 학교에 입학해 9살에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14살 때, 아버지 피터 제퍼슨이 죽고 토마스 제퍼슨은 5,000 에이커(약 20㎢)와 삼십명의 노예를 상속받았고 상속받은 땅에다 집을 지었다. (몬티첼로)

아버지 사후에도 꾸준히 학업을 이어간다. 16세이던 1760년, 윌리엄스버그에 있던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 입학해 2년간 공부하고 1762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윌리엄 스몰 교수에게 철학을 공부하는데 스몰 교수는 제퍼슨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철학 외에 다양한 공부를 한 제퍼슨은 폭넓은 교양과 학문을 가진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3. 지식인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졸업 후 법률가로 활동한 제퍼슨은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변호사로 많은 법적 소송을 다루는데 1768년에서 1773년까지 주 의회에서 해마다 100개 이상의 소송을 도맡아 변호하는데 이는 그의 배경도 좋았지만, 법류가로서 매우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계몽 사상을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는데 폭넓은 지식과 교양, 재능으로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 최대의 르네상스식 인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4. 정치적 신념

유럽의 인권운동과 계몽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제퍼슨은 식민지인들(미국인)은 모두 자연권이 있으며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고 영국 의회는 영국만의 의회이며, 식민지의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주장한다. 제퍼슨은 반연방주의를 지향해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이상화하고 도시와 자본가를 믿지 않았고, 각 주의 독립과 자유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대농장주였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부정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이중적인 면이 있었다.


5. 독립 운동 및 독립 선언서 작성

제퍼슨은 1769년부터 반 영국투쟁에 합류를 하게 된다. 1775년 6월부터 제2차 대륙회의 위원으로 재직하던 중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 제퍼슨은 5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독립 선언서를 쓰기 시작한다. 제퍼슨은 자신이 굳게 믿던 계몽 사상을바탕으로 초안을 작성하는데 제퍼슨은 5인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의 도움과 버지니아 헌법의 초안과 조지 매이슨의 버지니아 인권 선언, 그리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완성했다. 몇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776년 7월 4일 독립 선언서가 대륙회의에서 승인된다.


6. 대통령

1776년 9월, 제퍼슨은 버지니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고 1779년부터 1781년까지 버지니아 주 주지사로 재직하면서 후방에서 미국 독립군을 지원한다. 1784년부터 1789년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로 재직하는데 이때 파리의 살롱 문화를 접하고 프랑스를 동경하게 된다. 미국이 독립하고 프랑스에서 귀국한 제퍼슨은 국무장관을 역임하는데 이때 연방주의자들과 본격적인 대립을 하게 된다. 이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재임 4년간내내 반대적인 입장으로 존 애덤스를 곤란하게 만들고 결국 재선을 못하게 막고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 본인이 당선되며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기록된다. 외국인법 폐지, 보안법 철폐 등을 위해 노력하는등 민주국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1802년 육군공병사령부(Army Corps of Engineers)와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 설립,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 등의 업적으로 1804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재선 임기동안은 계속해서 지지율이 하락을 하는데, 여기에는 그의 사상이 당시로서는 많이 앞섰다는 점과 연방 대법원장과의 갈등,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출항금지법 때문에 무역에 타격을 입으면서 큰 비난을 받게 된다. 1809년 임기가 끝날때까지 제퍼슨에 대한 미국인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7. 퇴임 및 최후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을 하는 등 학술활동에 큰 공헌을 한다. 제퍼슨은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부 평등의 기회를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교육 활동 등으로 말년을 보내던 제퍼슨은 1826년 7월 4일 향년 83세로 사망을 하는데 그 날은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날이며 독립 선언서를 같이 쓴 동지이자 그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존 애덤스도 같이 사망을 하는 데 애덤스는 제퍼슨이 죽고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애덤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 있는데…"였다고하는데 이는 두 사람간의 라이벌 관계를 꼬집은 말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지만 죽을 때에는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제퍼슨의 장인이 죽을 때, 제퍼슨과 그의 처남이 땅을 나누었는데 당시 빚이 있던 장인의 몫까지 제퍼슨과 처남이 다 맡아야 하였고 그 빚의 이자까지 불어나 엄청난 빚을 떠안았던 것이다.

사후 그의 땅은 경매로 넘어갔다. 1831년 제퍼슨의 552 에이커(223 헥타르)에 달하는 영지는 제임스 T. 바클레이라는 사람에게 7000달러로 팔렸다. 토머스 제퍼슨은 샬러츠빌에 있는 몬티첼로 영지에 묻혔다. 그는 유서에서 몬티첼로를 정부에 헌납하고 모조 전쟁이나 바버리 전쟁에서 죽은 해군 장교들의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로 쓰기를 희망하였다.


8. 평가

제퍼슨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아내 마사의 죽음 때, 그와 그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을 붙태우고 당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제퍼슨은 미국이 자유 농민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농업 국가로의 발전하기를 원했는데 제퍼슨의 이런 생각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대조되며 워싱턴 행정부에서 이들과 장관으로 근무시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제퍼슨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후세의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경험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제퍼슨은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정치인,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작가, 발명가, 농장주, 외교관, 음악가,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창립자였던 제퍼슨은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8년의 재임 기간 동안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며, 현재까지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역대 대통령 조사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2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흑인 여성인 샐리 헤밍스와의 불륜 관계로 5명의 사생아가 제퍼슨의 서자녀일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몬티첼로의 성인"으로 불리던 제퍼슨은 "인민의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평생 국가보다는 국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고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쇼니 족 추장 테쿰세 형제 등에게 강제로 미국문명을 주입하는 과정에서의 마찰과 인종차별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가치관에 노예 제도로 인하여 참혹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 예언하지만 정작 노예 제도의 폐지에 대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1800년 초 그 시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때문인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다소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그때 그는 잘했다고 평가를 해 주는게 옳지 않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