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북위 분열의 원인 육진의 난(六鎭之亂) 설명

올드코난 2017. 2. 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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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진의 난(六鎭之亂)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 말기 523년에 발생한 반란을 말한다. 6진은 북위의 북쪽 국경지대에 설치된 여섯 기지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육진의 난으로 북위는 국가로서 존립자체의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동위와 서위 그리구 북제와 북주로 분열된다. 남북조 시대 후반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북위 분열의 원인 육진의 난(六鎭之亂)

[육진의 난 원인과 배경]

1.수도 이전

북위는 북방의 유민족이 세운 국가이지만 이들을 위협하는 세력 또한 북방의 이민족들이다.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 평성을 지키고 북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진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곳에 거주하고 지키는 세력들에게는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대우가 좋았지만,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이때부터 대접이 소홀해진다.

2.한족화의 부작용

북위의 한화정책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수의 선비족이 다수이 한족(중국인)을 다스리는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비족 귀족층이 한족 문벌귀족층에 편입되면서 선비족들 사이에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차별이 발생하면서 여기에 불평불만이 거세졌지만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한 것이 북위 조정의 한계였다.

3. 군부의 차별

한화정책의 문벌귀족화로 군대는 낮은 신분층에 되며 차별을 받는다. 더부나 북위의 군대는 북위의 건국과 화북통일의 주역이며 공신들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군부를 신분이 낮은 집단으로 여겨 차별하게 되고 여기에 조정은 한족화 되었지만 군부는 오히려 선비족화 되면서 조정과 군이 이질적인 집단으로 분열하게 되는데 이는 이후 우림(羽林)의 변의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그리고 특히 차별을 받았던 곳이 지방군 즉 육진 지역이었다.

4.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 폐지

북방 민족은 여성의 입김이 매우 강해 외척이 황권을 장악할 우려가 커서 만들어진 법이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로 태자의 친모를 죽이는 법이었다. 잔인한 법같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것이다. 선무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바로 이 법을 폐지하면서 그렇게 우려했던 외척이 권력을 장악한다.

그 결과 호태후는 북위 역사상 최초로 친모에서 황태후가 되고 이후 호태후는 동생의 남편되는 원차, 친아들인 효명제와도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북위는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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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의 난 발생과 과정]

1.옥야진 민란

이러한 불만들이 옥야진 백성의 거병으로 분출된다. 523년 봄 6진중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옥야진에서 파육한발릉(破六韓抜陵)이라 사람이 옥야진의 수비대장을 죽이고 진왕 원년이라고 개원하면서 6진의 반란이 시작된다. 파육한발릉은 곧 서진하고 나머지 6진들을 공략하고 524년 4월에 고평진에서 혁련은이 반란을 일으켜 파육한발릉에게 협력하고 토벌군을 지휘하던 임회왕 원욱이 참패하면서 반란세력은 동으로는 요서, 서로는 감숙에 이르는 북변 전역을 장악하고 북위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변방의 여러 주에서 호응하는 큰 세력을 갖게 되고 북위 조정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유연(柔然)족의 군대에 패해 525년 20만명이 투항해 초기 반란은 진압된다. 하지만 북위는 진압후 처리 과정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 이들을 기, 정, 연의 3개 주에 분산 배치한 후 구휼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다시 반란이 발생을 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는 당시 조정의 귀족화로 6진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6진의 투항병들은 다시 봉기한다.

2. 유현진의 반란

북위는 군사국가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영토 내부에도 진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성안의 백성 즉 성민(城民)이 있다었다. 문제는 이들 성민들의 형편 또한 북부의 6진 못지 않아 이들은 반란에 동조를 하게 된다.

525년 8월 6진 중 파육한발릉에게 동참하지 않았던 유현진에서 두락주(杜洛周)가 반란을 일으킨다. 두락주는 연호를 진환으로 고치고 그 휘하에는 고환을 비롯해 채준, 울령, 단영, 팽락 등이 가담한다. 옥야진 반란에 가담했다 항복, 정주로 이치되었던 회삭진 내에서 선우수례가 봉기하고 갈영(葛榮)이 봉기 세력을 접수해 반란을 이어간다. 갈영 군은 북위의 토벌군 광양왕 원심을 격파하고 원심을 죽인후 하북 남부지역과 하남, 산동에 영향을 떨치는데, 두락주 세력이 남하해 정주와 영주를 함락하자 528년 두락주 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두락주를 죽인 후 세력을 흡수해 하북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3. 서부지역

이 시기 서쪽에서는도 파육한발릉의 봉기에 호응했던 3개 반란세력이 준동하고 있었는데 섬서성 일대의 고평진(高平鎭)에서는 혁련은(赫連恩)이 칠륵 추장 호침을 고평왕으로 추대하고 호침이 파육한발릉에게 유인되어 죽자 만사추노가 이 세력을 흡수하고, 진주성에서는 막절태제가 진왕으로 차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남진주성에서 손엄, 장장명, 한조향이 막절태제에 호응하는데 막절태제가 죽자 아들 막절염생이 황제를 칭한다. 양주성에서도 우보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 중 가장 세력이 큰 것은 현지의 저, 강족의 지지를 받은 막절염생이었다. 막절염생 군은 동진하여 기주, 북 화주, 빈주의 응대를 받았고 얼마안가 내분으로 막절씨가 멸망하지만 반란 토벌군의 지휘관인 소보인이 자립을 시도하다 패하고 만사추보에게 가 합류를 하게 된다. 여기에 재기를 노리던 파육한발릉은 칠륵의 추장 곡율금 세력과 손을 잡고 서쪽의 막절염생 및 호침 세력을 통제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 남쪽

육진의 난 이전까지 북위는 양나라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북위의 힘이 우위에 있었고 양나라는 막는 형국이었었지만 육진의 난으로 북위가 혼란에 빠지자 양나라는 북위를 공격한다. 527년 양의 명장 진경지는 와양을 공격하는데 북위는 원소(元昭)의 5만여 구원군으로 파견하지만 진경지에게 13개 성채가 모조리 격파되고 와양성이 함락되며 구원군은 거의 전멸당하고 포로가 3만에 달한다.

5. 이주영의 권력 장악

동쪽은 갈영의 세력이 하북을 장악하고 서쪽은 여러 반란군이 장안을 위협하고 북쪽은 파육한발릉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남쪽은 양나라의 북벌이 시작되자 북위는 장안과 낙양을 잇는 지역 외에는 통제가 안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이런 혼란 상황에 이주영이 등장한다. 이주영은 8천호에 달하는 부락민과 수만필의 말을 소유한 이주씨(爾朱氏) 일족의 수장이며 수용 일대의 추장이다. 이주영은 반란이 일어나는 과정에 재산을 털어 유능한 무장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넓혔다. 병력은 8천 정도로 적은 편이지만 질적으로는 우수한 정예병사였다. 528년 병주 지역은 사실상 이주영의 지배 영역이 되고 북위 황족이며 병주자사 원천목 등은 이주영에게 조정을 장악할 것을 건의한다. 또 근위군 외의 모든 군대가 동요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효명제와 호태후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자 효명제는 결국 이주영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호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2살짜리 원소를 즉위시키는데 이는 이주영이 정치에 간섭하는 명분을 주게 된다. 이주영은 낙양을 장악하고 장락왕 원자유(元子攸: 효장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호태후와 어린 황제 원쇠를 황하에 빠뜨려 죽여버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명분으로 백관 2천여 명을 학살했다. (하음의 변) 고환은 이주영에게 제위에 오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안 이주영은 이를 포기한다.

6. 하북 평정

이주영은 주국대장군, 녹상서사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세우고 북위 조정을 장악한다. 이주영 세력 휘하에 있는 원천목이 대도독동북도제군사로 임명되고 명목상의 총사령관이 되어 하북을 장악한 갈영과 맞붙게 되었다.

갈영의 세력은 이 당시 거의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갖고 있었다. 태원 북쪽에서 갈영에 호응하는 고건, 고오조, 고계식 형제가 군대를 일으켜 이주영을 공격해 이주영의 본거지 태원까지 진격해오기도 했는데 이주영은 이런 공격을 격파한 후 동생인 이주천광을 태원에 남아 지키게 하고 528년 9월 7천의 병력으로 태행 8형 중 네번째 관문인 부구를 통해 업성 근처로 진입했다. 갈여의 백만 대군과 이주영의 7천이라는 병력차이는 매우 컸지만 질적으로 이주영이 우세했고 여기에 군대를 산골짜기에 숨기고 기습부대를 편성한 다음 먼지를 일으키고 북을 치고 병력의 규모를 숨긴 다음 갈영 세력의 지휘부를 향해 돌결해 격파하고 갈영을 생포하는 대성을 거둔다. 총 100만에 이른다는 갈영군은 한 번의 싸움으로 격파되고 수십만의 패잔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만다.

7.진경지의 북벌

호태후의 일파 북해왕 원호(元顥)는 하음의 변이 터지자 양나라로 망명했는데 양무제는 원호를 북위의 황제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북벌을 계획하고 진경지에게 맡긴다. 북위 조정의 우판으로 진경지는 하남 일대를 손쉽게 평정 양나라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남을 평정한 원호와 진경지는 서진해 낙양으로 향하고 원천목의 대군마저 격파하고 북위의 조정은 북쪽으로 파천하고 낙양은 진경지 군에게 점령되고 529년 5월 북해왕 원호는 낙양궁에 들어가 스스로 황제가 된다. 진경지는 북벌 과정에서 32개 성을 함락시키고 47회의 교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8. 물러간 진경지

원호는 원래 교만하고 게으른 인물이고 또 진경지의 남부군은 낙양에서 포악하게 굴어 북위의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해 양나라의 통치를 기대했던 낙양의 주민들을 실망시킨다. 여기에 원호는 양나라에게서 독립하려 들자 진경지의 양나라 군대와 원호의 군대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이들은 이주영 군단의 세력이 여전히 강성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주영이 북쪽에서 대를 이끌고 남하하고 황하에 이르자 북위는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에 원호와 진경지는 황하의 남쪽 기슭에 군을 포진해 이주영의 군이 황하를 넘는 것을 막았다. 이때 황하를 건너는 다리는 모두 파괴되고 배도 없애버렸다. 이에 이주영은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밤중에 황하를 건너 원호의 진영을 공격해 승리를 거둔다. 원호의 부대가 무너지자 진경지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로 후퇴하다 때마침 홍수에 휘말려 진경지의 군대는 괴멸되고 진경지 자신은 승려로 위장해 겨우 혼자 살아 돌아가게 된다. 진경지의 북벌은 이렇게 끝나고 하남 일대도 평정되지만 이주영의 위상은 떨어지게 된다. 


9. 반란 종결

최대의 반란세력 갈영이 토벌되고 진경지의 북벌을 막아내자 육진의 난을 마무리 국면으로 넘어간다. 갈영의 잔존세력 한루의 군대가 529년 평정되고 여러 반란 세력들이 북위에 투항한다. 남은 것은 관중 일대의 반란세력으로 당시 관중에는 묵기추노를 비롯한 이민족 할거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주영의 토벌군에 맞서 연합하지 못하다 묵기추노가 포로로 잡히고 이전에 토벌군으로 파견되었다가 묵기추노에게 가담했던 소보인도 포로로 잡히고 마지막 할거 세력인 묵기도락까지 포로로 잡히면서 관중, 관서 일대도 평정되면서 육진의 난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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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의 반란 이후]

1. 이주영의 최후

육진의 난을 평정한 이주영은 북위의 사실상 권력자가 되고 이주영의 일족 이주씨는 지방을 완전히 장악한다. 북위 황제 효장제 원자유의 아내는 이주영의 딸 이주영아(爾朱英娥)였고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과 사예 일대는 이주영과 큰아들 이주보제(爾朱菩提)), 이주도율(爾朱度律), 이주세융(爾朱世隆) 등 이주씨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 군대가 주둔하고, 산서지방에는 이주조(爾朱兆), 관중과 관서지방에는 이주천광, 산동지방에는 이주중원(爾朱仲遠)이 자리잡았다. 사실상 북위는 이주씨의 천하였다.

문제는 이주영은 덕이 없는 사람이었다. 승리에 대한 자민심과 잔인한 성격으로 사냥 중 사슴 한마리라도 벗어나면 연좌죄를 물어 여러명을 죽이고 호랑이가 병사들을 덮쳤는데 병사가 그걸 피하면 참수하는 등 민심을 잃어간다.

이주영에게 위협을 느낀 효장제와 대신들은 결국 이주영 암살을 계획하는데 이주세륭이 이를 눈치채고 이주영에게 수차례 경고하지만 자만심에 빠진 이주영은 이를 무시하다 결국 황후가 출산한다는 거짓 정보로 이주영을 궁궐 내로 유인한 효장제와 대신들에 의해 이주영, 이주보제, 이주양도(爾朱陽覩) 등 이주씨의 일족 30여명과 이주영과 친했던 원천목이 참살되고 만다.

2.고환의 권력 장악

이주영이 참살되자 각지에서 이주씨 일족은 병력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는데 3개월만에 모든 방어가 무너지고 낙양은 이주조에게 점령된다. 이주조는 효장제와 황제의 자식과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참살하고 낙양 황궁을 대거 약탈고 원엽을 황제로 세웠지만 정권을 잡은 이주조의 역량은 이주영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이주씨가 아닌 이주영 군단의 장수들을 차별하고 횡포를 부르는 등 결국 각 지방에서 이주씨의 전횡에 반발하는 세력이 일어났고 이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고환이었다.

이주씨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고환은 정권을 장악하고 효무제를 세운다.

3. 분열된 북위

효무제가 고환에게서 도주해 관중 일대의 실권자 우문태에게 합류하면서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게 되고 이후 두 위나라는 곧 북제와 북주로 명칭이 바뀌어 새로운 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6진의 반란 의미]

6진의 반란은 남북조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당시 국력은 북조의 북위가 남조의 양나라를 앞서는 상황이었다. 만일 6조의 반란의 발생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중국을 통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6조의 반란은 또한 필연이었다. 6조의 반란은 민란의 성격이 있다. 민란은 차별과 혹독한 정치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6조의 반란으로 북위가 멸망했다기 보다 북위가 망국으로 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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