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마이클 조셉 잭슨, 마이클 조지프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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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소개]
마이클 조지프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 6월 26일(KST))은 팝의 황제라 불리는 미국의 가수이다.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 캐서린 잭슨과 그룹 팔콘스(The Falcons)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 조지프 잭슨 사이에서 9남매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1963년 나이 6세 때부터 친척들과 형제들로 이루어진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와 후의 '잭슨스(The Jacksons)'에서 활동했고 약 1억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하였다. 1971년 나이 14세 때 1집 앨범 Got To Be There내고 솔로로 데뷔했다. 1979년 처음 솔로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했다. 그 후 Thriller(1982), Bad(1987), Dangerous(1991),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995)등의 앨범을 발매하였다. 이중 Thriller는 전 세계적으로 1억 4백만장이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앨범들은 현재까지 7억 5천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또한 그래미 시상식에서 13개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노래 〈빌리 진(Billie Jean)〉은 '문워크(Moon walk)'라 불리는 안무를 유행시킨 히트곡이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에 역대 최연소인 33세로 그래미 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을 받았고 2001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 에서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으며, 2002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93년에 아동 성추행과 관련한 기소가 있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판례1:2005년도에는 2003년도부터 시작된 10개의 기소가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되었다.) 잭슨을 고소했던 조단 챈들러(당시 13세)는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후,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돈을 바라고 꾸민 짓이었다고 고백했다.
2009년 7월 8일부터 2010년 2월 24일까지 영국 런던 O2 아레나 등에서 콘서트 'This Is It'를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2009년 6월 25일(항년 50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2009년 7월 7일,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특히 이 날 장례식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딸 캐서린 잭슨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7월 잭슨이 사망한 지 1달 후 그의 주치인인 '콘레드 머리'가 사망 24시간 전에 강력한 마취제를 주사하여,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그의 과실치사 혐의에 관한 증거물들을 압수 수색했다. 같은 해 8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치사량 수준의 강력한 마취제 때문에 사망했다고 24일 웹사이트를 통해 보도했다 2008년 빌보드지는 '핫 100 차트(Hot 100 Chart)'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마이클 잭슨은 8위에 올랐다
1.생애
잭슨 파이브
그는 1958년 8월 29일 출생했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보였던 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잭슨 파이브로 데뷔한다. 그 당시 5살이었던 그는 리드 보컬을 맡게 된다. 멤버들은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으로 모두 가족들이었으며, 흑인 그룹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서 거의 모든 곡이 1위를 한다. 13살 때 음악잡지 롤링 스톤 지의 표지모델로 나왔다. 또한 'Dancing Machine' 등의 디스코 음악이나, 'I Am Love' 등과 같은 곡 또한 1위를 차지한다. 1974년 공중파에서 최초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였고 그 춤을 유행시켰다. 1975년 그들의 레이블인 모타운 레코드를 떠난다.
레이블 결별과 Off The Wall
그들은 모타운 레코드를 떠나 1975년 6월 새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와 계약한다.그들은 이름을 '잭슨즈'로 바꾸고 북미 투어 등 많은 콘서트를 한다. 그들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6장의 앨범을 더 냈으며, 마이클은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This Place Hotel', 'Can You Feel It' 등을 작곡하며, 싱어송라이터로도 인정받게 된다.
그는 실력있는 뮤지션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스와 만나게 되고,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을 1979년에 발매한다. 재즈, 펑크, R&B, 댄스 등의 화려한 흑인음악을 보여줬다. 게스트로는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와 같은 천재 뮤지션들도 참여하며, 전 세계적으로 1500만 장을 넘게 판다. 이 앨범은 1979년 당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흑인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또한 전 세계 차트에서 거의 1위를 석권했으며, 여러 음악매거진들은 점수를 모두 만점을 주고, 호평을 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린 앨범 200'에서 80위를 거둔다. 같은 해 그래미 어워드, 빌보드 뮤직 어워드 등의 상을 모두 차지한다.
Thriller, Motown 25, We Are the World 그리고 사업
백악관 남쪽 현관인 사우스 포티코에서 로날드 레이건,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함께 (1984년 5월 14일)
1982년 그는 대히트앨범인 'Thriller'를 발매한다. 이 앨범또한 퀸시 존스가 참여했고, R&B, 락, 펑크, 댄스를 주요 장르로 하는 앨범이었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 이나 음악적 쟝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앨범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기네스 북에 잭슨을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인으로 등록시켜준다. 일주일 만에 100만 장을 돌파한 앨범이며, 37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또한 9곡중 7곡인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re', 'P.Y.T.(Pretty Young Thing)'은 빌보드 탑 100의 10위 안에 올라 이전의 잭슨 본인이 "Off the Wall"에서 세웠던, 한 앨범에서의 탑 10 안의 4곡 안착의 기록을 무색하게 만든다. 빌보드 블랙, 락, R&B, 댄스 차트를 따로 기록하자면 앨범 중 총 7곡이 1위를 기록한다. 앨범 자체는 2006년 집계로 약 1억 400만 장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은 정치, 경제의 잡지 주요 인물들을 고집해왔던 그간의 표지 제작의 방침을 깨고 발간 이후 최초로 연예인인 잭슨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썼으며, 표지 제작은 잭슨의 개인적 친구이기도 했으며 그 스스로도 최고의 실력자인 현대 미술가 "Andy Warhol"에 의해 이루어진다.
수록곡 중 빌리진은 싱글, 댄스, 알엔비, 블랙 차트에서 모두 동시에 1위를 차지한 유일한 곡이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7주동안 1위를 했다. 이 곡의 비디오는 이전에는 흑인 음악의 비디오를 틀기를 거부했던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최초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다른 1위 히트곡인 'Beat It'은 최초로 집단 댄스를 보여준 뮤직비디오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무직 비디오 제작의 큰 틀로 쓰이는 포맷이다. 극장 상영용 영화 필름에 쓰인 '35mm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곡 Thriller의 뮤직 비디오는 14분짜리 대작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며 근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최고의 뮤직 비디오로 지목되는 데 일반인, 평론가를 막론하고 별 이론이 없는 작품이다.
1983년 'Motown 25: Yesterday, Today, Forever'에서의 잭슨 5의 공연에 이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의 단독 공연은 음악사상 뿐 아니라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 중 하나로 문화 평론가들로 인해 평가된다. 잭슨의 드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moonwalk"가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 공연이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성공시킨 "Justified"의 작곡가/프로듀서인 페럴는 이 순간을 "the moment if you weren't a michael Jackson fan, you became a michael Jackson fan"으로 단정지었고, 유명 R&B 가수 브라이언 맥나잇은 누군가가 그렇게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공연을 본 후 자신은 울었다고 회고했다.
빌보드 1위의 자작 힛트곡 "비트잇"의 반폭력 메시지와 당시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대한 협조, 오랜 기간에 걸쳐 펼쳐온 자선활동(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고 가장 많은 수익을 남긴 1984년 "빅토리 투어"의 이익금 전액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고 마이클 잭슨 본인은 단 한 푼도 안 가지고 갔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에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다. 또한 같은해 영국에서 콘서트를 개최해 이 투어로 약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1985년에 그는 'We Are The World'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 오랜 기아로 인한 아프리카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구제 활동을 목적으로 이익금 전액이 아프리카의 구호 활동에 쓰여지도록 전해졌다. 미국에서 약 2000만 장 이상이 팔리고, 이는 아직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남아있다. 'We Are The World'는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40여명의 가수들을 "USA for AFRICA"라는 단체 이름 아래 참여시킨 초대형 프로젝였다.
성형, 영화 그리고 Bad
마이클 잭슨은 선천적으로 백반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으나 1984년 펩시콜라 광고 촬영 도중 심한 화상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더 급격하게 악화된다. 초기에는 블랙화장으로 백반증을 가렸으나 점차 증세가 악화되자 화이트화장으로 가려야만 했다. 수술은 어린 시절부터 코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어 한 번 했고, 공연 리허설 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코를 심하게 다치면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마이클 잭슨이 성형중독이라는 등,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를 박피했다는 등의 루머에 시달리게 된다.
1987년 5년 만에 발매하는 Bad를 발매한다. 역시 이 앨범도 퀸시 존스와 작업했으며, 전작인 'Thriller'보다는 앨범판매율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인기나 실력 면에서는 더욱더 좋아졌다. 5개의 싱글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는 모두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폴란드를 제외하고는(4위), 전 세계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약 3000만 장이 팔렸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 해의 그래미어워즈에서 최다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하나의 수상도 하지 못하는 앨범이 된다.
2009년 '1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of the MTV Generation'에 올랐다. 또한 롤링스톤지에서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에서 202위를 차지했다. 또한 뉴욕 타임즈에도 이 앨범에 대해 소개했다.
잭슨은 영화감독 'Francis Ford Coppola'와 3D 영상으로 찍어낸 'Captain EO'를 제작, 출연했다. 이 영화는 디즈니와 계약하여 만든 영화이며,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내용이 짜여 있다. 같은 해 9월부터 그는 'Bad World Tour'를 한다. 이 투어는 1987년 9월 12일 부터 1989년 1월 27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5만 7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자서전,네버랜드
1988년 그는 첫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한다. 이 책은 4년동안 모두 200만권 넘게 팔렸고,두 번째 자서전인 'Jackson 5'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쓴 책이었다. 이 책들은 모두 뉴욕 타임즈에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다.
같은해, 그는 캘리포니아 주 'Santa Ynez'에 17억을 들여,약 330만 5340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를 건립한다. 그의 친한 친구인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은 'King Of Pop'이라고 칭했으며, 미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그의 취임식때 그를 백악관에 초대한다. 그는 또한 펀드로 200만 달러의 이익을 본다.
Dangerous 와 Heal the World Foundation
1991년 1월 잭슨은 소니 뮤직과 6500만 달러에 새 계약을 한다.그는 8번째 앨범인 Dangerous(1991)을 발매한다. 2008년까지 약 700만 장 넘게 더 팔린다. 약 3200만 장이 팔렸고, 빌보드 200에서 1위로 데뷔했다. 전 세계에서 1위를 했다. 이 앨범은 뉴잭 스윙의 장르로 만들었다. 첫 싱글인 'Black Or White'는 7주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두 번째 싱글인 'Remember The Time'은 8주 동안 5위권 안에 들었으며, 빌보드 100에서 3위를 했다. 1992년 그는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한다.그는 자선기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치료로 목적을 두었다. 같은해 6월 27일 'Dangerous Tour'를 1993년 12월 3일까지 한다. 잭슨은 67개의 콘서트로 3700만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특히 1992년 부카레스트(부쿠레슈티)공연은 HBO가 사들여 방송하여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그는 이집트, 가봉을 방문해 기아의 걸린 아이들 찾아가기 등을 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35살의 나이에 '살아있는 전설상'을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여받아 살아있는 전설상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을 냈으며, 베스트 R&B 상을 받는다. 또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베토벤을 제치고 지난 천년동안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뽑혔으며 레코딩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 등재되었다.
성추행 기소,이혼,공백기
1993년 잭슨의 인생중에서 가장 곤혹스럽고 힘든 일이 온다. 바로 성추행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당시 잭슨은 월드투어 중이었고,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그는 이런 사건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명예와 인생의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1992년 잭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자동차 정비소의 도움으로 도로주행 중 고장이 난 밴을 수리할 수 있었다. 정비소 주인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잭슨에게 소개시켰고 소년과 잭슨은 절친한 사이가 됐다.
잭슨과 소년, 소년의 어머니, 양아버지 그리고 친아버지인 에반 챈들러는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으나 그 과정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적 문제로 허덕이던 소년의 친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잭슨을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잭슨의 면전에서 "당신을 파멸시키고 말겠다"고 말했던 챈들러의 악의적인 계획은 결국 마이클의 무죄로 끝났다. 하지만 95년, 법정 외 합의로 2200만 달러를 받아냈다. 훗날 마이클 잭슨의 사후에 조단챈들러는 가난한 아버지 에반챈들러가 꾸민 사기극이었다고 고백하며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잭슨이 무혐의 판결을 받고도 아동성추행자로 몰리게 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자는 것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이끌려 음악활동을 하느라 어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왕국 '네버랜드'에서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고, 잭슨의 이러한 취향을 아는 지인들은 그의 어린이 같은 버릇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으로서는 약점을 잡혔던 것이다.
1994년 5월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며,배우,싱어송라이터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 둘은 1975년부터 만나왔으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둘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했으며, 행복하게 서로 살았으나, 결혼 2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HIStory
1995년 첫 더블앨범인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995)를 발매한다.
Disc 1에는 그의 베스트 곡들이 수록돼 있고,Disc 2에는 그의 신곡이 수록돼 있었다. 히트싱글이었던 'Scream'은 동생인 자넷 잭슨이 참여했고,당시 700만 달러짜리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뮤직비디오로 기네스 북에 올라있다. 이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 5위를 기록했고, 또 하나의 히트 싱글인 'You Are Not Alone'은 R&B싱어송라이터인 알 켈리가 작곡하여 싱글 차트 입성 1주째에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 곡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차트에서 1위를 거두고, 싱글 앨범만 100만 장이 팔리는 등 미국내에서만 700만 장 넘게 팔렸다. 이 앨범으로 1996년과 1997년에 그래미 어워드에서 5번 후보에 지명되었으며, 그 중 Scream이 Best Music Video-Short Form 부분에서 수상하였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HIStory World Tour'을 개최한다. 총 82번의 콘서트를 했으며, 450만명의 팬들이 모였다. 1996년 두 번째 아내인 데비 로우와 11월 14일 결혼한다.그리하여 두아들 딸인 프린스 마이클과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을 낳는다. 같은 해 한국에도 방문했다. 1997년 무주리조트 투자를 위해 한국을 2번째 방문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3번째 방문했다. 1999년 '마이클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독일에서 투어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게스트는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 멘 등과 투어를 한다
Invicible, 세 번째 아이
그는 자신의 소속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계약문제로 트러블이 생겼었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측은 80년대 후반에 마이클 잭슨과 15년간 앨범 6장을 내는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Invincible 제작을 시작한 마이클 잭슨이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격분한 토니 모톨라 전 소니뮤직 사장은 라디오 방송 횟수만으로 싱글 차트에 각각 10위, 14위에 오른 'You Rock My World'와 'Buterflies'의 싱글 발매 시기를 늦췄다. 이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14번째, 15번째 싱글 차트 1위 곡이 될 수 있던 두 곡은 금새 차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001년 마지막 정규앨범인 Invincible(2001)을 발매한다. 6년 만에 내는 정규앨범이며,최종적으로 약 1300만장이 팔렸다.앨범에는 Notorious B.I.G,알 켈리,베이비페이스 등이 참여했다.이 앨범에는 제작할때 힙합프로듀서인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에 참여여부를 물어봤다가 거절당한 사연이 있다.싱글인 'You Rock My world'는 3주동안 빌보드 차트 10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솔로 데뷔 30주년 공연'을 열어, 어셔, 휘트니 휴스턴, 엔싱크, 마야, 98 디그리즈, 루더 벤드로스 등이 참여한다. 잭슨의 셋째 자녀인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잭슨은 셋째 아들을 블랭킷이라고 부름)은 2002년에 태어난다.
두 번째 성추행 문제
2003년 그는 13살짜리 아이인 게빈과 함께 잤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여론은 그를 다시 성추행범이라고 몰았다.
사기 전과범 재닛 아비조는 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들 개빈을 도와달라고 잭슨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는 흔쾌히 병원비를 지불하고 치료를 도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년과 친구가 됐다. 그러나 재닛은 그 대가로 잭슨을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사기전과만 10범이 넘는 전과 사기범이었던 재닛은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고 만장일치 무죄로 잭슨은 승소했으나 잭슨은 또 다시 언론과 여론의 근거 없는 비난을 받게 됐다.
마지막
마이클 잭슨은 그가 생전에 죽도록 저주하던 영미 타블로이드 일간지들에 의해 '많은 빚을 진 비참한 말년의 한 때 잘 나가던 슈퍼스타'로 그려졌지만, 마이클 잭슨의 전 재산은 빚을 모두 제외하고도(2010년 3월 현재 빚은 없다) 1조 5천억원 정도가 남을 액수라고 밝혀졌다. 게다가 그 액수는 디스이즈잇 DVD, 블루레이 수입과 비틀즈 판권, 엘비스 프레슬리 판권, 네버랜드 등을 뺀 순수한 현금으로만이다. 그가 파산 위기에 있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2008년 그는 Thriller 25라는 기념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에는 베스트곡들이 절반 정도 수록됐고,나머지 곡들은 새롭게 리믹스 시킨 앨범이다.앨범에는 힙합&알엔비 프로듀서이자 유명랩퍼인 카니예 웨스트와 에이콘,퍼기, 윌 아이 엠이 참여했다. 또한 일본판에는 그의 라이브곡을 여러개 수록했다.전 세계에서 300만장이 팔렸고, 벨기에, 콜롬비아, 유럽, 인도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또한 같은 해 전 세계에서 King of Pop이라는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어 전 세계에서 다시 1위를 차지한다. 2009년 3월 투어 준비 도중 동물협회인 'PETA'와 마찰이 생겼다. 2009년 5월 그는 전 홍보담당인 레이몬 베인으로부터 4천4백만 달러의 소송을 당했다. 그녀는 잭슨이 계약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어쨌든 그는 새 앨범 발매에 발맞추어 2009년 'This Is It' 런던 50회 콘서트를 시작으로 건재한 모습을 과시하려 했다. 공연은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50만 개의 티켓은 판매 개시 5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AEG 라이브'등의 음반기업, 콘서트 기업 등과 여러 계약을 하고 컴백 준비 중이었다.
죽음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타인에 의한 정맥 주사 투입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12:22분 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잭슨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그는 당시 숨을 쉬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이러한 효과가 통하지 않자 1: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된다. 2:26분 병원관게자는 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주치의 머리 콘래드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브 원더,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비욘세는 자신의 콘서트를 하던 중 '황제여 영원하라'라고 발언했으며, 그의 동료인 마돈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그를 추모했다.
사후
그의 죽음에 전 세계사람들은 슬픔에 빠졌고,많은 이들이 애도했다.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2009년 7월, 그의 소속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가 그의 라이브와 마지막 리허설 장면을 바탕으로 총 3부로 이루어진 영화인 디스 이즈 잇을 제작할 것이며, 잭슨의 계약회사인 'AEG 라이브'와 협상 중이라고 한다. 또한 잭슨은 그의 어머니인 캐서린에게 생활비를 매달 지급하게 했다.
2009년 7월 28일 AP 통신은 그의 주치의인 '콘레드 머리'가 강력한 마취제 성분인 '프로포폴'을 주사하여,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현재 경찰과 수사당국은 머리의 과실치사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휴스턴 병원'과 창고를 압수수색 하였다.
2009년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009년 10월 28일 그의 영화인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주동안 개봉되며,동명의 앨범인 This Is It이 같은 해 10월 26일에 발매되었다. 또, 이 앨범에 실린 싱글인 'This Is It'이 발매됐으며, 빌보드차트에서 앨범은 1위, 싱글은 43위에 머물렀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11일, LA카운티 검시소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한 검시기록의 일부를 공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인이 -타인에 의해 주사 된 정맥내의 과량의 프로포폴 및 약물에 의한 살인 (Homicide) 으로 명시되어 있다.
2010년 2월 52번째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아들과 딸이 대리수상받았다.
같은해 2월, 잭슨이 주치의로부터 타살됐다고 법원으로부터 공식으로 밝혀졌다.
2010년 11월, 에픽 레코드와 마이클 잭슨 재단은 그의 첫 사후앨범인 앨범 《MICHAEL》를 발매한다. 첫 싱글은 지난 07년,08년에 R&B 가수인 에이콘과 작업했으나, 유출됐던 "Hold My Hand"가 첫 싱글이다. 앨범은 발매 첫주만에 300만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2.음악적 성향
음악 스타일과 메시지
그는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앨범까지의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락,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장르로 했다.80 ~ 90년대에는 거기에다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에 발매한 Invincible에서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로 알려진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에 그가 지향하던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이런 그의 시도들은 그가 매우 혁신적인 뮤지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장르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음악에 여러 매세지를 두고 제작했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 'They Don't Care About Us', 'Smooth Criminal' 등의 음악은 전쟁으로 변하는 세계와 전쟁 반대, 인종차별, 학대, 범죄의 위험성 등을 강조한 음악이다. Gone Too Soon은 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만든 곡이다.
또한 그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그가 데뷔했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무하마드 알리, 말콤 엑스의 뒤를 잇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 향상에 마이클 조던 과 함께 동시대에 많은 인종적 장벽을 깨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음악계의 거대한 영향력
그는 우선 음악의 장벽을 깼으며, 뮤직비디오를 대중음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팝 뮤직의 정석을 잘 정리하고 포장했으며, 그의 목소리는 R&B와 힙합, 팝 아티스트 등에게 많은 영향를 줬다. 특히 알 켈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어셔, 니요, 머라이어 캐리, 저스틴 팀버레이크, 에이콘 등이 그러하다. 그는 또한 젊은 세대에서 남녀 노소 모든 세대가 아울러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잭슨은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으며,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또한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그의 이름을 올렸다. 2002년에는 '이 시대 최고의 송라이터'로, 2006년에는 앨범 스릴러로 'The Biggest Selling Album Of All Time'에 기록됐으며, 지금까지 그래미상 19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13회, 빌보드 어워드 40회, RIAA어워드 56회 등 많은 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370개에 가까운 상을 받았고, 그의 앨범은 총 약 7억 8000만장이 판매되었다.
그는 남자 솔로 아티스트 중 가장 많은 앨범이 판매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보컬 스타일
잭슨 파이브 시절 그의 목소리는 보이 소프라노에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하지만 솔로 데뷔 후부터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스타일로 변했으며, 당시 대중, 롤링 스톤지, 뉴욕 타임즈 등은 그의 목소리를 신이 내린 목소리이며 완벽한 목소리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3. 대한민국과의 인연
첫번째 내한
잭슨은 지난 1996년 대한민국에서 첫 내한공연을 펼쳤다. 사실 잭슨의 투어전의 수많은 고비가 있었는데, 마이클 잭슨은 93년에 일본공연을 취소하고 한국에 오려고 했으나 당시 L.A 한인 폭동때문에 불발되기도 했었고, 그 전 해인 92년에 아시아에서 투어가 잡혀있었으나, 그 때만 해도 일본, 대만, 태국, 필리핀 등에 밀려 투어 선정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 10월 당시 히스토리 투어공연도 5개의 종교, 시민단체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반대 대책위원회'까지 결성하고 같은해 7월부터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의 항의편지와 전화걸기를 수없이하며, 공연에 대해 반대적이이서 무산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문화부에서 공연을 승락하며 일단락되기도 했다.
같은해 10월 그는 외국가수들 중 최초로 국빈급으로 초청받았으며,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MBC 어린이 합창단들과 환영만찬을 받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만나 담소를 나눴다.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끝낸 그는 이어 잠실 롯데월드에 가기도 했다. 거기서 경호원이 "왜 놀이동산을 가느냐?"라고 묻자 잭슨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도 필요하다. 감성이 필요하고 영감이 떠오르게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번째 방한
첫내한 이후 그는 1년뒤인 1997년 11월 18일 다시 대한민국을 찾았다. 당시 외환위기에 휩싸였던 해에 잭슨은 전라북도 무주군의 무주리조트에 묵었다. 당시 '무주리조트에 세계 최대의 테마파크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방한했다'는 설이 나돌았으나, 본래 목적은 판문점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방한한 것이다. 그는 판문점, 비무장지대는 물론 북한 평양에서 공연하고 싶다했다.
그는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당시 대선에서 가장 유력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측근인 유지사에게 접근했다고 했다.
또한 당시 무주리조트 내의 특급호텔이었던 티롤호텔 501호는 프레지던셜 룸이었던 만큼 고가의 가구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그는 방에 묵으며, 침대 옆 데스크에 볼펜 심으로 'Love and save our children. Korea is god and Muju is love. Love always.'라고 적었다고 한다.
세번째 방한 & 네번째 내한
1998년 2월 그는 또 다시 1년만의 한국을 되찾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한다. 평소 평화와 아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후에도 김대중 대통령과 친한 사이로 남을 수 있게 됐다.
1999년 잭슨은 그의 아들 프린스와 패리스를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서울 올림픽주 경기장에서 세계전쟁희생자 및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 '마이클과 친구들'이라는 타이틀로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 맨, 루더 밴드로스, 중화권의 코코리, 리밍, 한국의 H.O.T와 S.E.S가 참여해 공연했다. 잭슨은 공연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면 반드시 내가 기념공연을 하겠다'고 밝힐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공연 3일전에는 갑작스럽게 대형 음반 판매점의 국내 보육 시설 어린이들과 방문했는데, 예상없는 방문이라 수많은 인파에 경호원은 물론 관계자들이 많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또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에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호텔에서 묵던 시절 비빔밥의 맛에 반한 뒤, 간장을 소스로 먹는 '마이클 잭슨 비빔밥'이 호텔 내에 매뉴로 생길만큼 한국 음식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내한 후
그는 내한 후에도 한국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의상을 지난 오랫동안 주문해 공식석상에 입고 나왔으며, 비록 앙드레김이 정중히 사양했지만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지난 2009년 죽기 전 북한에 억류된 기자인 로라 링과 유나 리에 대해 걱정하며, '김정일이 나와 비슷한 의상을 착용한걸 봤다, 혹시 내 팬이라면 그들을 석방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방법을 알아봐달라'라고 했다. 그 이후 로라 링과 유나 리는 빌 클린턴 전(前)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회유하여 미국으로 데리고 왔다.
기타
마이클 잭슨은 대한민국이 통일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대한민국의 통일을 돕고 싶어했다. 또한 대한민국이 통일되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방문해서 남한과 북한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2009년 6월 사망함으로 인하여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4. 관련 이야기
§ 《Bad》(1987) 앨범에 수록된 'Smooth Criminal'의 공연 도중 중력을 무시하는 듯이 30도에 가까운 각도로 무대에 서있는 동작을 선보인 적이 있으며, 이를 소위 린 댄스(Lean Dance)라고 부른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이 이 춤과 관련된 장치를 직접 설계하고 특허 출원을 받은 적이 있다.
§ 2009년 7월 8일부터 2010년 2월 24일까지 영국 런던 O2 아레나 등에서 콘서트 'This Is It'를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마이클 잭슨의 사망으로 공연은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콘서트의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은 이 티켓을 마이클 잭슨의 유품으로 간주하여 환불을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이 티켓이 경매에 올라와 아주 비싼 가격에 낙찰되기도 했다.
§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온라인 커뮤니티 게임인 세컨드 라이프에서는 유저들이 그를 애도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 2009년 8월 세컨드 라이프의 인월드 내 여러곳에 마이클 잭슨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이터널 문워크라는 홈페이지가 만들어져 일반인들의 문워크가 올려지게 되었다.
§ 잭슨의 의상들 중 특히 앙드레 김의 의상 작품들이 많은데, 그것은 지난 1999년 내한 때 처음으로 의상제작을 시작했으며, 이후 10여년동안 잭슨이 영국 런던에서 특별상을 수여받았을때,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초청됐을때, 모나코에서 공연했을때 등등 큰 자리에서 종종 그의 의상을 입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잭슨은 앙드레 김의 디자인의 맘에 들어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한 적도 있다 할 만큼 관계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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