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박정희가 유일하게 믿었던 인물.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올드코난 2014. 6. 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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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최근 6.4지방선거 서울시 교유감 후보 고승덕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 몇일전에는 그의 딸이 고승덕 교육감에 반대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과거 고승덕의 장인이었던 고 박태준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박정희의 업적은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박태준 회장을 측근으로 둔 것! 박정희가 유일하게 믿었던 인물, 위대한 기업인, 한국의 철강왕 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의 일대기를 정리해 본다.

[차례] 요약, 생애, 사후평가, 올드코난의 평가


1.요약

박태준(朴泰俊, 1927년 10월 24일(음력 9월 29일) ~ 2011년 12월 13일)

경상남도 출신, 호는 청암(靑岩)이다. 육군 소장 예편, 기업가, 정치가.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로서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제3위 철강업체로 키운 대한민국 철강업계 대부이며 세계 철강업계 거목으로 꼽힌다. 대한민국의 "철강왕" 혹은 대한민국의 "카네기"라고 불리며 정치인으로서 민주정의당 대표,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주요 상훈: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한국경영자대상(1992) 사후 청조근정훈장 추서.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 철강국으로 끌어올린 공로로 미합중국 카네기 맬런대학교, 영국 셰필드대학교와 버밍엄대학교, 캐나다 워털루대학교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와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2009년 12월 21일 고려대학교에서 국내 대학교에서는 처음으로 명예 경영학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 이 있다.

 

2.생애

1927년 10월 24일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박봉관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일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랐다. 1940년 일본의 이야마북중학교에 진학했고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제철 근로봉사에 동원되었고 포항제철의 포부는 이때 시작된 것으로 본다. 1945년 일본의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와세다 대학을 입학했다고 한다)

 

해방후인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박정희와는 1947년 육사 시절 생도와 중대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사에서 중대장과 탄도학 교관을 맡고 있었다. 생도였던 박태준의 우수한 수학 실력과 자기 규율에 엄격함에 박태준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이후 박정희와 다시 만나게 되고, 이후 박태준은 박정희의 충실한 부하가 된다.

박정희가 5 16 쿠데타를 일으킬때도 참여하려했지만 박태준을 신뢰하던 박정희가 쿠데타가 실패할 때 가족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족을 부탁할 정도로 박정희가 확실히 믿었던 인물이 박태준이었던 것이다.

 

쿠데타 성공후 軍政(군정) 당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박태준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에 재임명된다. 그리고 박정희 의장이 전국 순회와 행사에는 박태준이 늘 동행 했다고 한다.

 

1963년 박정희의 대선 출마를 앞두고 대장으로 예편하고, 같은해 박태준은 소장으로 예편한다. 박정희의 다른 측근들은 정치인이 되었지만, 박태준은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 부임 1년 후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해 경영인으로서 자질을 보여주고 1967년 4월 포항제철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를 놀라게한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룩한다.

 

1979년 대통령 박정희가 죽자 그의 아들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청했다. 이후 박지만을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준다.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박태준을 임명하고 이를 계기로 박태준은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 당선 국회 재무위원장 역임,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맡게 된다.

하지만 박태준은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당시 후보 면전에서 “당신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해 김영삼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10월 포항제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난다. 거기에 국회의원 자리로 내 놓는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포항제철의 여러 협력사에서 39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패를 비판하며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치적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1997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과 김대중 연합정권을 지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도왔다. 김대중 정부 후반인 2000년에 국무총리로 취임했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2011년 12월 13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박태준 사후 평가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 1991년 연구 보고서 -한국의 성공 기업을 본다: “포스코가 성공 가능했던 첫 번째 요인으로 모험 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역,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회장 박태준의 공헌이었다"

하버드대학교 경영 대학원 서울대학교 공동 연구 -포철의 경영 성공 사례 (1992년) : "회장 박태준의 탁월한 리더십이 포스코 성공의 가장 주요 요인이었다“

스탠포드대학교 경영대학원 보고서: "한국의 발전과 포철의 역할에서 회장 박태준의 탁월한 리더십을 토대로 성공할 수 있었다“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박태준은 대한민국의 간디, 인도인들이 간디에게 ‘성스러운’ 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를 붙여 주듯이 저도 그분의 이름에 마하트마를 붙여 ‘마하트마 박’이라고 칭하고 싶다”

삼성 故 이병철 회장 " 박태준 회장은 군인의 氣(기)와 기업인의 魂(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스티브잡스가 IT업계에 미친 영향보다 박태준 회장이 한국 산업과 사회에 남기신 좋은 공적이 몇 배 더 크다"

 

4.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박태준 회장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김영삼에게 ‘대통령 자격이 없다’라고 앞에서 비판할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을 좋아해 꽤 많은 정계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욕심이 없지는 않았으니, 절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본다.

먼지는 묻었을지언정 똥이 묻지는 않은, 적당히 때가 묻었지만 더러움은 없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가족을 맡기려 한 사람이 박태준이었다는 것을 보면 박태준은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진정 의리가 있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생애를 통틀어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었다.

 

정치인으로서는 미흡했지만, 기업인으로서는 훌륭했다.

군사 독재시절 다른 대기업 재벌들처럼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당시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직원들에 대한 복지혜택이 좋은 회사로 만들려 노력을 했다. 오늘날 기업들의 사원복지의 원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포항제철은 가장 근무하고 싶은 회사였다. 지금도 근무조건이 좋은 기업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단지, 박태준 회장에 아쉬운 것은 그는 죽는 순간까지 박정희를 존경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박정희의 겉으로 드러나는 카리스마에 현혹되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한국 경제발전을 박정희 때문에 이룩했다고 평가를 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개발 독재는 국민이 아닌 국가와 기업의 이득으로 돌아갔다. 당시 근로자들의 삶은 미래가 없는 비참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박정희 재임 시절 부자가 되었다면, 권력에 유착한 재벌들과 강남 개발 같은 땅투기로 부자가 되었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 정권은 졸부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유신체제로 넘어가면서 국가경제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민생은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그나마 박정희 유신시절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었다.

 

예전에 어떤 경제학 교수가 한 말이 있다.

박정희의 업적은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박태준을 측근으로 둔 것이라고.


박정희 주변에 있던 자들은 모두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한 자들이었고, 유일하게 권력이 아닌 자신의 꿈과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포항제철의 성공이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중공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태준이 박정희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한 인물로 냉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박태준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진보 진영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명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이셨다. 

고 박태준 회장 같은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가진 기업인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는 말로 마무리 짓겠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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