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근태 의원을 포함해 수 많은 학생, 민주화 투쟁인사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던 이근안은 여전히 자신의 한 고문 행위를 애국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변명일뿐이며, 이근안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그리고 타인을 가혹하는 것을 즐겼던 잔인한 성품을 가진 자였다. 여전히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보수 편에 서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이근안을 보면 과연 한국이 제대로 된 사회인지 의심스럽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해 정리를 해본다. (위키백과, 한겨레 신문, 서울 신문 기사 참조)
반성도 죄의식도 느껴지 않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지금 한국사회에서 애국자라 우기는 한국 보수의 실체
이근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경찰이후의 부터의 삶과 현재에 대해 정리해 본다.
이근안(李根安, 1938년 ~ )은 공군 헌병 제대 후 1970년 경찰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경경찰 재직 중 사기꾼, 도박사범, 마약사범 등을 여러 명 검거하여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박중령, 불곰,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경찰청 대공분실 형사로 전보되어 1970년대 후반 대공분실장으로 승진 재직 중 김근태 의원을 포함한 많은 재야 인사 및 운동권 학생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근안의 즐겨했던 고문은 전기고문이었고 이 외 관절 빼기, 볼펜심 꼽기 등의 고문 기술로 많은 이들에게 잔혹한 고통을 주었는데, 이는 고문 대상자들의 거짓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이런 행위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이근안을 전두환은 무척 아꼈는지 1986년 10월 23일 경찰의 날에 전두환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전두환의 정권이 끝나면서 이근안의 경력은 끝이 나게 된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8년 불법 체포 및 고문을 시도한 혐의로 수배되었고, 동대문구 용두동을 포함해 도피행각을 벌이다 1999년 도피 11년 만에 자수를 했다.
자수후 검찰 조사에서 1985년에 김근태 의원에 대한 고문혐의와 1983년 함주명 조작 간첩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문했다는 증언, 1984년 간첩조작사건에 간첩으로 몰렸던 전직 예비역 군인 출신 이장형, 그 외에 반제동맹 사건 의혹 등을 조사 받았고 2000년 재판 결과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 형을 언도받았다.
수감 생활 중 이근안을 면회했던 김근태는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라며 이근안의 사과의 진의를 의심했다.
그 뒤 이근안은 2006년 11월에 출감하였다.
이근안은 출소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근안은 교도소에서 한국교정선교회를 통해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는데, 출소 후 총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 전도사를 거쳐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
이근안 같은 자가 목사가 되다나? 하고 놀라는 사람 많을 것이다.
개신교 목사 되는 거 그리 어렵지 않다. (큰 죄를 짓고 회개한다 주장하면 된다.)
하지만, 목사가 된후 이근안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는 언행을 보이는데, 과거 자신의 고문 활동이 애국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자 이근안이 소속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2012년 1월 14일 목사직에서 면직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자신의 자서전을 발표했는데, 이때도 이근안은 사과의 말은 없었다.
2012년 12월14일 저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 기념회에서 자서전에 사죄한다는 내용이 없다는 지적에 이근안은 사과 대신 회개를 했다는 표현을 썼다.
(고문 피해자들이 아닌 예수 앞에서만 죄를 인정하겠다는 이근안의 태도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잘못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후 2013년 1월7일자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잘못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만 일했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런 취급을 받나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고문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라 생각한다. 일일이 찾아가 사죄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교인으로서 참회, 회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사과라는 의미다"라고 변명했다.
여기까지가 위키백과와 언론 등에서 나타난 이근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이근안에 대해 평가를 해본다.
이근안은 새디스트적인 인물이다.
그의 고문행위는 일제 강점기 당시 순사들 보다 더 잔인했다.
그리고 그가 고문을 했던 방식들은 누구에게 배웠던 것들이 아니다.
모두 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잔혹행위들을 심문을 핑계로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가했던 것이다.
그는 고문을 즐겼던 것이지, 애국과는 무관하다.
이근안은 여전히 자신을 애국자라 주장하지만, 그에게 애국이란 출세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의 생애 단 한번도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은 없었다.
그리고, 이근안은 자수를 하기전까지 11년간의 도피생활 중 단 한번도 발각이 된 적이 없을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명을 가벼이 여겼던 인물이 자기 목숨은 귀히 여기는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인 것이다.
애국은 자기 희생으로 이어진다.
이런 인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할 것이고 나는 보지 않는다.
이근안은 애국자도 아니고, 우리가 아는 보통사람도 아니다.
비정상적인 비양심적인, 인간말종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고, 고 김근태 의원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면, 가해자 이근안은 여전히 큰소리를 치고 있다.
김근태 의원은 죽고 여전히 이근안은 큰소리치며 살아있다는 것은 원칙과 도덕성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정치인들만의 잘못으로 볼 수 없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제대로 못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보수는 유능하거나 애국자라 알고 있는 혹은 우기는 자들이 문제다.
한국의 보수를 더 이상 애국자들로 착각하지 마라.
그런 착각이 우리를 독재에 길들이고 있다.
제2의 이근안이 다시 등장할 수 있다.
당신도 고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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