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漢王)이 된 유방은 함양에 진입할 때 유방을 따르던 병사들이 10만에 달했지만 항우는 이중 3만 명만 따라가게 했다. 하지만 초나라와 다른 제후국(주로 전국시대 진나라 지역을 가리킴)에서 유방의 명성을 흠모해 따라온 사람이 또 수만 명에 달했다.
유방은 한중(漢中)에 진입한 후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를 불태워버렸다. 잔도란 절벽에 구멍을 뚫고 이 구멍에 기둥을 가로 질러 만든 일종의 인공 도로이다. 당시 한중으로 향하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곳곳마다 이런 잔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방이 이렇게 한 이유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추격병을 따돌리고 항우에게 자신은 함양으로 돌아갈 뜻이 없으며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원래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금의환향 할 것으로 믿고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방 진영의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초나라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워진 나머지 중간에 도망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승상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다.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등용해 착실하게 군을 정비한다. 그리고 유방은 기원전 206년 8월 천하를 쟁패하기 위한 동진(東進)에 나섰다. 우선 배후에 해당하는 옛 진(秦)나라 영토를 평정하러 나섰다. 기습적인 한나라의 공격에 옹왕(雍王) 장함이 잇달아 패주하자 한나라의 세력이 강력한 것을 확인한 새왕(塞王), 적왕(翟王), 하남왕(河南王) 등이 잇달아 유방에게 귀순했다. 사실 이전에 옛 진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유방에게 쏠려 있었고 새로 왕으로 임명된 자들은 항우에 투항해 자신들의 목숨만 살린 자들로 수십만의 진나라 장정들을 죽인 자들이라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유방은 손쉽게 진나라 영토를 차지했다.
유방은 기원전 205년(한 고조 2년)에 진나라의 사직을 없애고 한나라의 사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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