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항우의 40만 군대가 함양에 도착했다. 항우는 투항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항우는 재화와 보물, 여자들을 차지한후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함양의 거리는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항우는 고향인 동쪽(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장수들과 앞으로의 일을 논했다.
한 장수가 이에 답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하로 막혀 있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왕(覇王)이 될 만한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궁궐이 이미 불탔고 고향이 그리워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하고는 동쪽으로 돌아갔다.
항왕에게 권고했던 사람이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관을 쓴 격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이구나."라고 말하자 화가 난 항우가 그를 삶아 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항우는 회왕(懷王)을 의제(義帝)로 받들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먼저 다른 사람들을 왕으로 삼았다. 먼저, 공이 가장 큰 유방에게는 파(巴 지금의 사천성 동부), 촉(蜀 사천성 중서부), 한중(漢中 지금의 섬서성 남정현 일대)을 주고 한왕(漢王)으로 삼아 남정(南鄭 지금의 섬서성 한중시)에 도읍하게 했다. 원래 약속대로 하자면 유방이 최초로 관중(關中)에 진입했으니 비옥한 관중 땅을 주어야했지만 그를 견제하기 위해 길이 험하고 주민이 적은 파, 촉을 대신 준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관중을 3지역으로 나눠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들을 각각 왕으로 삼았다. 즉, 장함(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 서쪽을 맡겼고,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 동쪽을 맡겼으며 장함에게 투항을 권유한 도위(都尉) 동예를 적왕(翟王)으로 삼아 상군(上郡 한중 동쪽)의 왕으로 삼았다.
그 외 여러 공신과 제후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구군(九郡 지금의 하남성 동부, 산동성 서남부, 강소 및 안휘성 일부)을 봉지로 하여 팽성에 도읍을 정했다. 여기서 "서초(西楚)"란 팽성이 초나라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며 다른 왕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패왕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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