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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5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1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관 일곱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를 매삯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0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암소 다섯 마리를 기른다)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씨 댁과 진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 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9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 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가 되어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8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7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 최흥식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 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6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느 날은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씨와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 돈이 든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5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은 월급으로 석오(이동녕의 당호)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 주며, "애기 사탕이나 사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4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2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동 정탐 선우갑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한군 내무대신 동농 김가진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머리말 내 나이 이제 육십 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 삼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 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지키기 10 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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