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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인 노천명 作 사슴, 남사당,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올드코난 2010. 7.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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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詩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삽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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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천명 (1913 - 1957)
황해 장연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진내며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여성> 등의 여기자로 활동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 시집으로 <산호림><창변> <별을 쳐다보며>  <사슴의 노래>와 수필집 <산딸기> <나의생활백서>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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