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시

시) 시인 장만영 作 달 포도 잎사귀, 비, 소쩍새, 길손

올드코난 2010. 7. 13. 20:10
반응형

장만영

 

, 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덩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따.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길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

시인 장만영 (1914 – 1976) 소개 설명

황해 연백 출생. 호는 초애.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를 졸업. 유학시절 <동광>에 시 '봄노래'가 김억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을 바탕으로 했으며 현실 의식이 크게 반영된 작품과 농촌적 이미지화라는 두 개의 의식을 이중으로 노출시킨 세련된 시로 평까받고 있다. 시집으로 <> <축제> <유년송><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와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 등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