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1977년 11월 11일 발생한 최악의 철도사고 이리역 폭발사고 원인과 결과

올드코난 2015. 11. 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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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빼빼로데이로 전국이 즐거운 이때 한번쯤은 돌이켜 봐야할 사건이 있다. 마침 JTBC뉴스룸에서 소개한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정리를 해본다. (JTBC뉴스룸, 당시 사건기록 참고)

1977년 11월 11일 발생한 최악의 철도사고 이리역 폭발사고 원인과 결과


[참고:이리역 ] 이리역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고 1929년 9월 20일 역사를 근대양식으로 신축 준공해 쓰여지다 1977년 11월 11일 역 구내에서 화약열차의 폭발사고로 역사가 파손되고 1978년 11월 10일 새로운 역사를 준공한다. 1995년 9월 1일 익산역으로 역명을 변경했다.


1.개요

이리역 폭발 사고(裡里驛爆發事故)는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폭발 사고로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와 더불어 최악의 철도사고로 손꼽힌다.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화의 전신인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인 제1605열차는 당시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출발 대기하던 중 폭발사고를 냈다.



2.원인

당시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이 사고 당일 11일 오후 역 앞 술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고 화차로 돌아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켜 놓은 촛불이 침낭으로 떨어졌는데, 신무일은 몸이 뜨거워지자 침낭에 붙은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불길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어 대형 폭발사고가 났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열차의 단선 교행은 폭탄 및 화학 화물 화차가 여객 열차(만일 새마을호라 할지도)보다 우선 순위로 운행이 되고 있으며,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신호장, 신호소, 간이역은 물론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것을 무시하였고, 허술한 안전 의식이 문제였다.



3.피해

당시 익산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고 이리 시청 앞까지 파편이 날아갔다. 게다가 30km 떨어진 전주까지도 폭발음이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음에 핵폭탄이 터졌다, 전쟁이 났다라고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다.

이리역 주변 반경 500미터 이내의 건물 9,500여채에 달하는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어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사망자는 59명, 부상자는 1,343명 총 1402명이 피해자로 공식 집계되었다. (이 중 철도인은 16명이 사망했다.)

이 외 기관차 5량, 동차 4량, 화차 74량, 객차 21량, 기중기 1량이 붕괴되었고, 이리역을 통과하는 호남선 130m와 전라선 240m가 붕괴되어 총 23억여원의 재산 피해를 낳았다.


4.처리

사고를 낸 신무일은 오후 9시 13분경 맨발로 뛰쳐나와 “불이 났다, 불이야!”라고 외쳤고 역 사무실로 달려가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가 사고 다음 날 아침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에서 해당 열차의 다이너마이트를 맡긴 당시 36살의 신무일은 그날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추위를 막기 위해 촛불을 켰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쪽으로 넘어진 것을 감안해 법원은 신무일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 신무일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5.뒷 이야기

(1) 이주일

사고 당시 역 앞의 창인동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는데 극장 안에 관객 700여 명이 있었다.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2층 천장이 내려앉아 객석을 덮쳤고 이때 5명이 깔려 숨지고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때 가수 하춘화를 당시 사회를 보던 무명 코미디언 이주일이 그녀를 업고 구해주었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하춘화의 지원과 의리맨이라는 이미지로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당시 이주일의 유행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확실히 보여드리겠습니다”는 전국민이 따라했던 유행어



(2) 이 사고로 인해 대파된 가옥의 거주민들을 위해 이리역 북서쪽 모현동에 모현주공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이 아파트는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이며, 2010년에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었다

(3) 2008년 11월 13일 이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이리’가 개봉되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없게 봐서 추천은 못함 -.-)

(4)1977년11월11일 당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차범근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로 한국의 상대는 이란이었다. 이때 이란은 매우 강력한 상대였다. 대결결과는 2대2 무승부였고 당시 경기는 국민들을 환호할 정도로 박빙의 승부였었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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