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어느덧 45년이 흘렀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전태일 이후 분명히 개선이 되고 있다. 아직 차별은 여전하지만,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당시 노동자들을 자각시키고,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전태일 열사에 대해 소개해 본다.
(전태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위키백과, 전태일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전태일은 빨갱이도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다. 사람사는 세상을 원했을뿐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 생애와 편견들에 대해 설명해 본다.
1.전태일 프로필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동) 출생 ~ 1970년 11월 13일)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했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한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사건 당시 전태일은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고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방치되고 말았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해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다 결국 전태일은 사망하고 만다. 전태일 사후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2.전태일에 대한 편견들은
(1) 자신을 위한 노동운동이 아니었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에 밉보여서 1966년 여름 해고된다. 이때부터 전태일은 사실상 인권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고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전태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던 근로자들을 위해 나섰던 것이다.
(2) 북한을 싫어했다.
한국의 보수들은 노동운동을 했다고하면 종북몰이를 한다. 전태일에 대해서도 그런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태일은 북한 공산당을 싫어했다. 전태일은 거의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 중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야수와 같은 북괴는 평화 속에 잠긴 남녁 땅을 피로 물드렸다”라는 글을 썼다. 한국 전쟁은 북한이 먼저 도발해서 일으킨 전쟁이라고 전태일은 분명히 인식을 하고 있었고, 그의 노동운동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3)반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파업을 한다면 기업인들과 보수라는 것들은 파업 근로자들을 반정부자의자로 여긴다. 전태일 열사가 살던 60년대와 70년대는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는 반정부주의자도 아니었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 중 첫 부분을 소개해 본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중략) ”
예의상, 격식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정희에게 전태일은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탄원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태일이 원했던 것은 체제전복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시장을 개선해 달라는 것으로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해달라는 지극히 당연한 부탁을 대통령께 건의를 했던 것이었다.
3.왜 죽음을 선택했나.
전태일은 당시 사업자들과 노동청, 동대문구청 등 많은 관계자들을 만나 처우개선을 사정했다. 간혹 협상을 했다고 하지만, 협상이 아니다. 협상은 요즘처럼 노조가 어느정도 힘이 있을 때의 일이고 당시 노동자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태일은 공무원과 자본주들에게 간곡히 요청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이러한 바램과 요청은 완전히 묵살되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바로 그날인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켠 뒤, 평화시장 앞길로 뛰쳐나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녔고 이후 분신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4.사후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해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씨는 아들 전태일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5.평가
전태일 열사의 희생으로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이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의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했고 신문, 방송에서도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고, 당시 야당 정치인들도 근로자들의 처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 이라는 평가가 많다.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은 물론 민주주의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전태일을 반정부주의자 급진적이고 투사적인 인물로 알려져있지만, 실재로는 소박하고 온건한 성격이었다. 전태일이 원했던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여겨달라는 당연한 인권을 주장했을 뿐이다.
6.마무리
전태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 시민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전태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노동운동과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춰 그를 평가하고 있기때문인데, 전태일은 과격한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당시 비참했던 근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길을 가려했던 것이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우리들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던 착한 청년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교수가 말한 ‘열사 전태일’보다 ‘청년 전태일’로 부르는게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1995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제목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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