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미선이 효순이 사건) 설명 [효순 미선 사건 사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해야

올드코난 2017. 6. 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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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인 2002년 6월 13일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 재학중이던 신효순, 심미선 양(14세)이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소재 국가지원지방도 제56호선에서 갓길을 걷다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문제는 아직도 이 사건은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본다. (자료 출처 위키백과 참고)


1. 사건 발생 전

신효선, 김미선, 김다희 등은 졸업생이 10명 밖에 되지 않는 효촌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이다. 사건 발생일 2002년 6월 13일 (목요일)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는 날이며 다음날 14일은 효순양의 생일이었다. 광적면 효촌2리에 살고 있던 신효순과 심미선은 국도를 따라 언덕을 넘어 덕도리 쪽으로 300 미터 거리에 있는 친구 김다희가 사는 초가집 식당에 모여 다음날 친구 다섯이 모여 모처럼 의정부에 나가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는 등 놀러가기로 한다.


2. 사건 발생

이날 낮 10시 30분 경 신효선, 김미선 두 학은 마을을 나와 친구 집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44 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법원리 쪽에서 내려와 약간 왼쪽으로 틀어 막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선두 안내차량 1대, 병력 수송 장갑차, 그 뒤로 사고차량, 일반 공병궤도 차량 3대, 후미 안내차량 1대였다. 이때 맞은편에서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훈련장으로 오고 있었다. 이때 갓길을 걷고 있었던 두 여학생을 장갑차가 친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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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사 내용

두 여학생을 친 차량은 정확하게는 도하(渡河)작전용 부교(浮橋)를 들어올리는 특수 공병 궤도차량으로 AVLB(Armored Vehicle Launched Bridge)라 불린다.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도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로, 주민들은 평소 갓길을 인도삼아 통행했다고 하는데 사고가 난 도로의 폭은 3.3미터 정도인데 반해 사고차량의 폭은 3.65미터로 사고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으려면 갓길을 걷고 있던 학생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고가 난 길은 편도 1차로(폭 3.3미터)에 불과한 지방도로이며 현장은 서쪽은 법원리와 동쪽은 덕도리 사이의 골짜기로 급경사에 곡각지로 남쪽은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어 별도 인도가 없어 차가 온다면 사람이 피할 곳이 없는 길이다. 서쪽의 법원리에서 한참 내리막을 달려오던 차가 마을 앞에서 갑자기 도로 사정이 바뀌어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오른 쪽(남쪽)으로는 산을 끼고 휘어져 올라간다. (동아일보 2002.7.18 기사 참고)

사고가 난 이후 유족들은 "당시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 데다 마주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살인행위였다"라고 주장했다.


4. 사고 이후 조치

사고 당일 미8군 사령관은 유감의 뜻을 전하고 다음날 6월 14일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위로금 100만과 배상금 1억 9천여만원씩을 전달했다. 미군은 6월 15일 장례식을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장례식을 마친 후 번역상의 실수를 이유로 미군은 면담 약속을 파기하고 말았다. 6월 28일 캠프 하우즈 부대장 해롤드 대령은 미국으로 출국했다.


5. 사고 가해자 무죄 판결

7월 3일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을 과실치사죄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되었는데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한미 SOFA 규정에 공무 중에 발생한 미군들의 사고에 대해서는 1차적 재판권이 미군 쪽에 있기 때문에 사고 장갑차 운전병 마크 워커 그리고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는 미군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다. 7월 10일 법무부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냈다. 재판과정에서 사고를 낸 궤도 장갑차량은 운전병과 통신병이 통신장비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어 운전병은 두 소녀를 볼 수 없었고 관제병은 두 소녀를 봤지만 통신에 장애가 있어 운전병에게 알렸지만 전달되지 않았다는 두 미군의 진술을 토대로 2002년 11월 무죄를 선고를 선고하게 된다.


6. 국민들의 촛불집회 시작

국민들이 분노를 하게 된 것은 사고 발생일인 6월이 아니라 무죄 판결을 받은 11월이었다. 왜냐하면 사고 당시는 2002년 월드컵이 있던 때여서 국민들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월드컵에 이 사건이 묻힐뻔했는데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죄 판결을 받은 미군 병사들이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부터다. 이때 촛불이 등장한다. 수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고 이는 이명박 정부 당시 광우병 논란때 다시 등장하고 2016년 박근혜 탄핵요구로 이어지게 된다. 미선과 효선 학생의 희생이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으니 두 학생에게 고마움마저 느낀다.


6. 현재 진행중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요구

2012년 5월 이명박 정부때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개정에 합의하고 범죄 피의자인 미군 관계자의 신병을 기소 전에 한국 당국에 인도할 수 있도록 협정 운용을 개정하기로 합의했지만 아직도 못하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문재인 정부는 불합리한 SOFA 개정을 바로 잡아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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