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세(秦二世) 원년인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이 기현(蘄縣)에서 봉기해 진현(陳縣)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여 옛 초나라의 뒤를 이었음을 주장했는데 진의 폭정에 신음하던 수많은 군현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 냈다. 이때 패현 백성들도 소문을 듣고는 현령(縣令)을 죽인 후 유방을 맞아들여 패공(沛公)으로 삼았다.
원래 당시 나이로 보나 직위로 볼 때 유방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패현의 관리로 있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현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혹시라도 실패하여 책임 추궁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다. 이들은 평소 허풍이 세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유방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았다. 당시 패현 사람들이 선뜻 유방을 지도자로 추대한 이유는 평소 유방에게 여러 가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발생해 장차 귀인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패공이 된 유방은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잡아 북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군대의 깃발을 모두 붉은 색으로 정했다. 이는 앞서 적제의 아들이 백제의 아들을 죽였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유방 자신이 적제의 아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화덕(火德)을 타고 났다고 여겨 붉은 색을 숭상했다. 이때 이미 유방의 휘하에 거느린 병사의 수가 2∼3천명에 달했다.
진이세 이년인 기원전 208년 반진(反秦)의 기치가 점점 거세져 과거 제후국이었던 연(燕), 조(趙), 제(齊), 위(魏) 등이 자립해 각기 왕을 칭했고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인 항량이 조카인 항우와 함께 오현(吳縣)에서 군사를 일으킬 즈음 유방은 풍읍(豊邑)을 공격하는 진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하면서 풍읍의 수비를 고향 선배인 옹치(雍齒)에게 맡겼다. 하지만 옹치는 자신이 유방의 수하에 있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진승의 사주를 받은 위나라 사람 주불(周巿)의 꼬임에 넘어가 유방을 배신하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옹치의 배반에 화가 치민 유방이 군사를 돌려 풍읍을 공격했으나 병력등의 부족으로 패배해 패현으로 물러났다. 이후 소 지역에서도 패하다 탕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수하의 병사 수가 9천 명 가량으로 늘어난다.
이 시기에 유방은 그 유명한 장량(장자방)을 만나게 된다. 장량은 자신의 말에 신중하게 귀담아 듣는 패공(유방)의 인품에 감동하고 유방을 섬기기로 결심한다. 유방 자신은 물론 후대에 걸쳐 최고의 참모를 일컫는 장자방을 만난 것이다.
유방과 장자방의 만남은 이후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된다.
왜냐하면, 장량이 추천하는 인물들로 인해 훗날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황제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다.
유방이 장자방을 얻었을때 이미 대세는 결정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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