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제후군의 상장군이 된 항우

올드코난 2015. 12. 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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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군대가 정도에서 대패하고 나라의 기둥이던 항량이 전사하자 회왕(懷王)은 큰 두려움에 휩싸여 도읍인 우이(盱台)를 버리고 팽성으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회왕은 항우, 여신(呂臣 초나라 장수)의 군대를 통합해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여신의 부친인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으며 유방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아 무안후(武安侯)에 봉했다.


또 송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으며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했다. 여기서 송의가 상장군이 된 데에는 고릉군의 추천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릉군이 일찍이 회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송의가 무신군의 군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 말했는데 며칠 후 과연 그의 말대로 무신군의 군대가 패했습니다. 군대가 아직 싸우기도 전에 그 패배의 조짐을 알았으니 그는 병법을 안다고 할 만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회왕이 송의를 중용한 것이다.


이때 조나라가 진군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회왕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여러 장수들이 상장군인 송의의 휘하에 속했는데 송의는 안양(安陽)에 도착한 후 46일 동안 머물면서 진격하지 않았다. 본래 송의의 의도는 진(秦)과 조(趙)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의의 이런 뜨뜻미지근한 대응은 성질 급한 항우와 마찰을 빚었다.


항우는 "진군이 조왕을 거록에서 포위하고 있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나라 군사와 안팎으로 호응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송의는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는데 설사 승리한다 해도 피로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 피곤한 틈을 이용할 것이오. 반대로 진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추격에 나서 진나라를 함락시킬 수 있소. 그러니 먼저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게 하는 것이 상책이오.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실전을 하는 일에서는 내가 그대만 못하겠지만 앉아서 책략을 꾸미는 일은 그대가 나보다 못할 것이오."라고 말하며 거부했다.

그러면서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하는 자들은 목을 벨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후 아들인 송양(宋襄)을 제나라에 보내 제왕을 돕게 했다.


가뜩이나 송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항우는 송의가 제나라와 손잡고 모반을 꾀했다는 구실로 송의를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상장군이 되어 모든 군대를 거느렸다. 이때부터 항우의 위엄이 온 초나라는 물론 다른 제후들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조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항우는 직접 장하(漳河 하북성과 하남성의 경계를 흐르는 강)를 건너 거록을 구원했다. 항우는 장하를 건너자마자 타고 온 배들을 전부 가라앉히고 취사도구와 막사를 다 없애버린 후 겨우 3일분의 군량만 휴대하게 했다. 퇴로를 생각하지 않는 전술로 일종의 모험을 건 셈이다. 항우가 이렇듯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서자 초나라 군사들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당시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제후 군사들이 10여 진영이었으나 모두들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초군이 진군을 공격할 때도 다른 장수들은 모두들 자신의 진영에서 관망하면서 돕지 않았다. 사실 오합지졸로 구성된 제후 군대가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진나라 정예부대에 맞서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린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항우 휘하의 초나라 군사들은 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군은 일당십, 일당백의 용맹을 떨쳤으며 이들이 지르는 고함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초군의 용맹한 모습에 제후 군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진군을 무찌르고 난 후 항우가 제후군 장수들을 부르자 모두들 항우의 군문(軍門) 앞에서 무릎으로 기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때부터 항우는 비로소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다른 제후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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