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최초로 군대를 일으켰던 진왕(陳王) 진승이 진(秦)나라 군대에 패해 사망한 것이 알려지자 항량은 각지의 반란군 장수들을 설현에 불러 모아 대사를 의논했다. 패(沛)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던 유방(劉邦)도 패공(沛公)의 신분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지 반란군들은 군사를 일으킨 뚜렷한 목적이나 구호가 없었다. 그보다는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한 민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다. 항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새나라 창업같은 것은 계획에 없었다.
항연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는데, 범증(范增)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범증은 원래 거소(居鄛 지금의 안휘성 소현)사람으로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었다. 평소 벼슬을 하기보다 집에 머물며 기묘한 계책을 생각하길 좋아했던 범증이 항량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승의 패배는 당연한 것입니다. 진(秦)나라는 여섯 나라를 멸망시켰는데 그중 초나라가 가장 억울하게 당했습니다. 회왕(懷王)께서 진나라의 거짓말에 속아 억류된 후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회왕을 가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분명 초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승은 가장 먼저 봉기했음에도 초나라의 후예를 세우지 않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 세력이 오래 가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시니 벌떼같이 일어난 초나라 장수들이 앞다퉈 장군께 귀의한 이유는 항씨 집안이 대대로 초나라 장수를 지냈고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옹립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직접 왕 노릇을 하는 대신 초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옹립하라는 충고였다.
항량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남의 집 양치기로 있던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내 우이(盱台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를 도읍으로 삼고 초회왕(楚懷王)으로 삼았다. 이때 진영(陳嬰)은 상주국(재상)이 되었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을 칭했다. 이전까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들은 항량을 중심으로 모여 정식으로 나라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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