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은 이때 진왕(陳王)을 칭하고 있었다. 진승의 부하 소평(召平)은 광릉 공격에 나선 진왕(陳王)이 패주해 진(秦)나라 토벌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떨다 진왕의 명령을 사칭하며 항량에게 접근했다. 소평은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한 후 서쪽으로 진격해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항량은 소평의 말을 믿고 8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인근 동양현(東陽縣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에서는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로 감옥 관리를 담당) 진영(陳嬰)이 자의반타의반 현령으로 추대되어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항량은 자신의 군대가 규모가 작아 진영의 군대와 연합해 서쪽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진영의 모친이 진영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내가 너희 가문에 시집 온 이래 지금껏 네 조상들 중에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네가 갑자기 왕명(王名)을 얻는다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못된다. 차라리 남의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렇게 하면 거사가 성공한 후 제후에 봉해질 수도 있고 설사 거사가 실패할지라도 쉽게 화를 모면할 수 있다."
평소 신중하고 신의가 있어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던 진영은 모친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감히 왕을 칭하는 대신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항씨 집안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며 초나라에서 이름이 드높소. 그러니 지금 대사를 일으키고자 함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오. 우리가 명문대족에게 의탁한다면 진(秦)나라의 멸망은 틀림이 없을 것이오."
부하들이 모두 동의하자 진영은 병졸들을 거느리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갔다.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자 또 경포(黥布 원래 이름은 영포), 포장군 등이 속속 군대를 이끌고 휘하에 들어와 병력이 순식간에 6~7만으로 불어났다. 항량은 하비(下邳 지금의 강소성 비현)에 진을 치게 했다.
이때 또 다른 반란군 장수 진가(秦嘉)가 초나라 왕실의 후예인 경구(景駒)를 초왕(楚王)으로 옹립하고 초나라 수도가 있던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 동쪽에 진을 치고 항량을 막았다. 항량이 진가의 부대를 패퇴시키고 호릉(胡陵)까지 추격해 진가를 죽이자 그의 군대가 투항해 왔다. 항량은 진가의 군대를 병합한 후 호릉에 진을 치고 서쪽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한편, 진(秦)나라의 맹장 장함(章邯)은 율현(栗縣 하남성 어대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항량이 별장(別將)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餘樊君)을 보내 진군과 맞서 싸우게 했으나 여번군은 전사하고 주계석은 도주했다. 분노한 항량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설현(薛縣)에 진입했고 패배의 책임을 물어 주계석을 죽였다.
이에 앞서 항량은 항우에게 따로 양성(襄城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을 공격하게 했는데 성의 수비가 굳건해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보복으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항량은 당시 반란군의 주력군으로 성장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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