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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상순 作 첫날밤, (시인 오상순 해설)

올드코난 2010. 7. 1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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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순 詩


첫날밤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 !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빰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고

  침침히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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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상순 (1894 - 1963)

서울 출생. 호가 공초인 그는 <폐허>동인으로 문단에 데뷔(1920)했다가 일제시에는 절필, 해방후 다시 붓을 들어 허무와 명상의 구도적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중앙고보, 보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각지의 사원을 두루 다니며 참선의 생활도 했다. 1962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오상순시집>(1963)이 있다.

1920년대 〈폐허〉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인생의 허무를 주로 노래했다. 본관은 해주. 호는 공초(空超)·선운(禪雲). 성해(星海)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태연(泰兗) 4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 효제국민학교를 거쳐 1906년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한 뒤로 한동안 전도사로 교회일을 맡아보았는데, 이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성서와 철학책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1920〈폐허〉 동인으로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21년 종교를 그리스도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조선중앙불교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8·15해방 때까지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방랑벽과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서울로 돌아와 역경원 등을 전전하다 조계사에서 지냈으며, 1963년에 죽은 뒤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고, 시 〈방랑의 마음〉 첫머리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1920년 〈페허〉 창간호에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해 '폐허'는 그것을 극복해서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며 '폐허'의 옹호와 허무의 극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시 〈허무혼의 선언〉·〈아시아의 밤〉·〈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폐허〉 제2호에 〈힘의 숭배〉·〈힘의 동경〉·〈힘의 비애〉 등의 시 17편과 평론 〈종교와 예술〉을 발표한 데 이어, 1935년 대표시 〈방랑의 마음〉(조선문단, 1935. 2)을 발표했다. 그의 시에는 '허무·폐허·태고·원천' 등의 생경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며, 허무적·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해방 후 시 〈항아리〉·〈해바라기〉를 발표해 민족적 염원과 정서를 노래하기도 했다. 유고시집으로 〈공초 오상순 시선〉(1963)·〈방랑의 마음〉(1977) 등이 있고, 195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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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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