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육사 詩
청포도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식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더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나를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갈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켜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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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육사. (1904 – 1944) 소개 설명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록이며 아명은 원삼이다. 중국 북경 대학 사회학과 졸업. <자오선>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관헌에 피검되어 북경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감방 번호가 264였기 때문에 육사라 했다고 한다. 34편의 시를 남겼고 광복 후에 출간된 <육사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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