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육사 詩
자야곡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순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직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 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호수
내어 달라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줓빛 안개 가벼운 명상같이 내려 씌운다.
황혼
내 골방의 커어틴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어틴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길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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