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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인 신석정 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산수도, 추석, 임께서 부르시면

올드코난 2010. 7. 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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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정 詩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울부터 우리 정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읋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읍니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수도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추석

 

  가윗날 앞둔 달이 지치도록 푸른 밤,

  전선에 우는 벌레 그 소리도 푸르리.

 

 

  소양강 물 소리며 병정들 얘기소리,

  그 속에 네 소리도 역력히 들려오고.

 

  추석이 내일 모레, 고무신도 사야지만,

  네게도 치약이랑 수건도 부쳐야지...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릱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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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정. 1907 - 1974. 소개 설명

충남 서천 출생. 선물<시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0). 도회지를 멀리 떠나 전원생활을 하며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와 더불어 응결된 서정시를 발표한 그는<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촛불> <슬픈 목가> <빙하><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와 역시집 <중국 시집> <매화 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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