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수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의주 길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춘신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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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치환. 1908 - 1967. 소개 설명 이력
경남 충무 출생이며 호는 청마. 연회전문 문과에서 수학했으며 동인지 <생리>를 발간(1929)하기도 했다.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1931). 생명과 자연, 허무와 신을 노래한 시인으로 14권의 시집과 수상록을 발간했다. 시집으로는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보병과 더불어> <청령일기> 외에 다수의 작품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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