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독립전쟁의 도화선, 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 배경 설명

올드코난 2015. 2. 5. 14:46
반응형

1.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개요

당시 북아메리카(미국)를 식민주로 두고 있던 대영제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해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에 정박한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으로 미국 독립 전쟁의 서막을 알린 사건으로 평가된다. 존 아담스는 “the Destruction of the Tea in Boston”라고 표현했다.


2.사건의 배경

영국은 1765년 〈인지세법〉과 1767년 〈타운젠드법〉으로 의회 대표가 없는 식민지에도 과세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여기에 식민지 주민들이 반발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존 핸콕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중국산 차에 대한 불매 운동을 조직했다. 존 핸콕을 비롯한 밀수업자들이 관세를 물지 않고 차를 수입해 판매를 시작하자 차의 판매량은 320,000 파운드(145,000 kg)에서 520 파운드(240 kg)로 급감하게 된다. 1773년이 되자 동인도 회사의 적자는 크게 불어났고, 창고에는 언제 판매될지도 모르는 찻잎들이 쌓여가게 된다. 영국 정부는 〈차법〉을 통과시켜 동인도 회사가 식민지에 직접 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그로 인해 동인도 회사가 대영제국 업자들과 밀수업자들보다 싼 가격에 차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영국 상인들과 밀수업자들은 파산을 면치 못할 정도로 큰 피해를 본다. 이 피해는 다른 주민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이로 인해 식민지의 영국에 대한 분노가 확산하게 된다.



3.사건의 진행 과정

북아메리카의 대부분의 항구에서는 동인도 회사의 차를 실은 배의 하역을 거부했지만, 보스턴에서는 영국 총독 토머스 허친슨의 도움으로 영국 군함들의 호위 아래 차들을 하역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배에 실려 있던 차가 하역되기 전날 저녁, 새뮤얼 애덤스의 주도하에 세 집단으로 구성된 50여 명의 보스턴 주민들('자유의 아들들')은 올드 사우스 교회에서 출발하여 그리핀 부두로 향했다. 이들은 적발될시 처벌을 면하기 위해 모호크족으로 변장을 했다. 다트머스, 엘리너, 비버 등 세 척의 배에는 수백 상자의 차가 실려 있었다. 원래는 네 번째 배가 있었으나 보스턴에 닿기 전 코드 곶에서 좌초되었다. 인디언으로 변장한 주민들은 배에 올라 차 상자를 부수기 시작했다. 오후 9시까지 세 척의 배에서 총 342개의 상자(당시 £9,000의 가치)가 부서져 바다로 던져졌다. 주민들은 신발을 벗고 갑판을 청소하였고, 각 배의 일등 항해사들에게 '자유의 아들들은 차 상자만을 부수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격렬히 맞섰던 엘리너의 일등 항해사 데이비드 매튜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고 한다.


4. 사건 발발 이후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고,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배를 습격하면서 자물쇠를 하나 부쉈는데, "우리의 목표는 부당한 세금에 항거하는 것이지 개인의 재산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물쇠를 고치라며 수리공을 보냈다고 하는데, 배에 실린 차는 동인도회사의 소유이므로 배의 선장이나 선원들이 개인적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바다에 버려진 342박스의 차의 가치는 영국 파운드로 £9,000로 2014년 기준으로 보자면 1천7백만 달러 ($1.7 million US)로 원화로 환산하면 18억원 정도라고 한다.(추정치)

사건 발생후 벤자민 프랭클린은 돈을 모아서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노스경은 받기를 거절했다. 이는 당시 이 보스턴 차 사건이 독립을 원했던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5. 보스턴 차 사건이 중요한 이유.

보스턴 차 사건 당시만해도 미국인(American)이란 의식은 없었다. 버지니아 사람(Virginian), 필라델피아 사람(Philadelphian) 식으로 식민지 각 주(州)의 정체성이 더 중요시되던 시기였고, 영국인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였다. 독립 전쟁전만 해도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영국 의회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는 것이 당시 북미 식민지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전부터 영국에 대한 식민지 인들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 문제였다. 인권이나 자유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에 하는 이야기이고, 역시나 세금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사무엘 아담스가 한 말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말은 당시는 물론 지금 세대에도 매우 중요한 말이다.


많은 세금 부과도 문제지만, 차별이 생길 때 더 큰 불만이 생기는 것으로 조세 정의가 없으면 조세 저항에 부딪히는 법이다. 부자 감세, 서민 증세는 반드시 거센 반발과 혁명의 불씨가 된다는 것을 보스턴 차 사건이 보여준 것이다. 합리적인 세금은 부자 증세, 서민 감세가 최선인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