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사건 내용

올드코난 2016. 10. 1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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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군산 서해훼리 소속 110t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의 사망자를 냈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본다.

후진국형 인재,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Sinking of the MV Seohae, 西海フェリー沈没事故) 원인과 과정 사후처리 내용.


1. 개요

1990년 10월 건조된 110톤급 철선이다. 길이 33.9m, 폭 6.2m에 평균 시속 12노트로, 부안과 격포 사이를 1일 1회 정기 운항했다.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 221명이었다.


2. 침몰 사고

1993년 10월 10일 9시 40분경 당시 악천후였던 상황에서 362명의 승객과 화물 16톤을 무리하게 적재한 서해훼리호는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부안 격포항으로 출발했다. 10시 10분경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났고, 회항하려고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에 큰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다 곧바로 전복되고 침몰한다. 선체전복에서 완전침몰까지는 10분이 걸렸다. 서해훼리호에는 당시 9개의 구명정이 있었지만 2개만 작동되었고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탔고, 부유물에 매달렸다.


3. 구조작업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한다. 사고 1시간여 후,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와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고 10월 10일 22시까지 모두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4.수색작업

수색 초기에는 사망 및 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지만 시신의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10월 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5. 인양

선체의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200여 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였으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하였고, 10월 27일 다시 인양했다.


6. 사고 원인

악천후에 무리하게 운항한 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악천후였지만 일기예보 내용으로는 규정상 출항이 가능한 여건이었고,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으나 일부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고 한다. 선박의 운용의 문제점은 승객은 정원을 초과하였고, 승무원은 규정된 인원보다 부족했다.

가장 큰 이유로 열악한 운용 환경을 꼽는다. 승객에 비해 운항 횟수는 적고, 선박 회사가 크게 의존하던 국가 보조금도 중단되었고 선박업체가 영세하고, 선장이 업자의 눈치를 보는 환경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항을 거부할 수는 없던 것이다. 12월 1일, 해양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의 발표에서, 선박의 구조에는 문제가 없고,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12월 13일, 사건을 수사한 전주지검에서는 초과 승선과 과적, 운항부주의, 방수구(放水口) 부족 등이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발표했다.


7.다양한 주장

사고 직전 배가 흔들린 후에 승객들에 안전하게 선실에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커졌다는 일부 생존자들의 주장도 있고, 선박 회사가 연료를 줄이기 위해 위험한 항로를 운항했다는 현지 주민의 주장도 있었다. 배가 급회전한 것은 조종 미숙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파카 잠바가 구조에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연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 사고에 비해 생존자가 많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선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배의 구조가 불안정했지만, 1990년에 선박기술업체의 복원력 시험에 통과했었다고 보도하였다.


8. 피해자

공식적으로 292명이 사망했다. 희생자들 중에는 위도면 주민들이 60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군의 전산화를 담당하던 영관급 장교들 외 군 장교 10여 명을 포함하여 위도에서 낚시나 단합대회를 하거나 할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단체로 희생되기도 했다.


9. 보상

유가족들에게는 합의에 따라 사망자 1인당 9,910만원을 지급한다고 보도되었다. 사망자 보상 금액은 모두 282억 원이었으나 서해훼리호의 배상 능력이 10억 원 뿐이었고 해운공제조합에서 73억 원만 지급되어, 국민성금에서 남은 93억과 재해의연금으로 나머지 금액을 충당했다.


10. 사후

승객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대책본부의 운용에도 문제가 있었고 해경의 초기 대응이 늦었다, 후진국형 인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부 주도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진행되었고 문책인사로서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 군산지방해항청장이 해임되었다. 교통부와 해운항만청의 관계 공무원 38명이 문책되었고, 해운조합이사장도 해임되었다.


11. 마무리

서해훼리호 침물사고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는 유사한 점이 있다. 과적등의 안전규정 위반과 안전의식이 부족등이 사고로 이어졌다. 여기에 기후가 좋지 않은 점도 있지만, 과적이 가장 큰 외부적이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두사건에서 전혀 다른 점이 있다. 서해훼리호 사건은 후진국형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선장과 선원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서해훼리호 승무원 전원은 사망한 반면, 세월호 침몰사고에서는 선장과 주요 선원들이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이는 직업정신의 부재와 인간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현시대를 암시한다고 생각해 본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사라지면,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본다는 것을 세월호 사건에서 재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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