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이기백 구출 전인범 일화, 전인범 아웅산 영웅 과장된것 (이기백이 전인범 중장을 키웠다)

올드코난 2016. 12. 1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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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OO여대 심OO 총장 남편되는 전인범 중장의 일화가 최근들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다. 이 글들만 읽고 보면 이순신 장군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영웅은 전인범 중장인 것 같다. 나는 그를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그를 고의적으로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영웅으로 포장되고 미화하고 있다. 특히 당시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대적인 홍보와 영웅 행세를 하는 행태도 보기 좋지 않지만 이는 다분히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은가 의심이 든다. 지난 2016년 7월 전역을 해 현재는 민간인 신분이기에 군 명예는 훼손하지 않는다고 판단 그의 실체에 대해 조금씩 정리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전인범의 출세의 배경이며 영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인 아웅산 테러 당시 목숨을 걸고 이기백을 구출 한 영웅이라고 과장하는 것부터 짚어 보겠다. 위키백과 등에 공개된 내용을 토대로 차근차근 정리해 본다. (참고: 위키백과, 나무위키, 전인범 방송 인터뷰 등)

전 국방장관 이기백 구출 전인범 장군 일화, 전인범 아웅산 영웅 과장되고 포장된 것. 칭찬정도로 끝낼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 실세 이기백이 전인범을 키웠다. )


우선 그의 어린시절부터 간략히 살펴본다.

1. 금수저 출신

1958년 9월 6일 서울 출신 경기고등학교(1977. 73회), 육사(1981. 37기) 졸업. 그의 집안을 보면 대표적인 금수저 집안이다. 할아버지 전항섭은 유한양행 사장이었고, 아버지 전주화는 한의사 어머니 홍숙자 박사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였다. 그의 고모 전혜성 예일 대학교 교수의 장남으로 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를 지낸 하워드 고는 그에게 내종형이 된다. 부인 심OO은 1956년 생으로 남편 전인범보다 2살 위이며, 현재 OO여대 총장이다. 전인범의 외모 때문에 서민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한국의 상류층 집안이다.


2. 어린시절

7살에 이혼한 외교관 어머니 홍숙자와 미국에서 5년 정도 살았고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TV 시리즈 컴뱃(Combat)을 보며 샌더스 중사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 12살 때 한국에 돌아와 외삼촌과 국군의 날 행진을 보고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육사 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인용)

학창시절 겁도 많고 운동도 못해 체육에서는 C, D 정도를 받았다. 단, 어머니 홍숙자 박사는 전인범에게 한국에서 AFKN만 보게 하고, 저녁식사 때는 영어로만 대화하게 했는데 이 영향으로 능숙한 영어실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평소 밀리터리 매니아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들을 보면 총을 들고 사격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많다. 정리해 보면, 총싸움은 좋아하지만 운동은 못하고 공부도 썩 잘하는 편도 아니고 단지 영어만 잘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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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사 입학

1977년 육사 37기로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의혹들이 나온다. 우선 육사 37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이 입학한 기수다. 그래서 육사 37기에는 당시 고위 장성들 아들들이 대거 지원한 일명 ‘황금 기수’들이었다. 실재 고위장성 아들 10명이 이때 입학했다고 전한다. 이때 전인범은 입학 성적이 꼴찌에서 두번째였지만 영어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합격했다고 본인이 추측하는데 그의 어머니 홍숙자 여사 덕분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뒷말이 나온다. 이유는 홍숙자 박사가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았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숙자 박사는 전인범에게 '지만이 잘 챙겨줘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전인범의 육사 입학 배경이 다른 고위장성들처럼 대통령 아들 박지만과 인연을 맺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4. 실세 군인 이기백을 만나다.

육사 졸업후 소위에 임관되고 1981년 30사단 소대장으로 근무 중 당시 1군단장 이기백 중장 전속부관으로 발탁되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위 계급을 달고 3성 장군인 군단장 전속부관을 맡게 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다. 더구나 이기백은 대한민국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친구였는데 고작 중위에게 전속 부관을 맡겼다? 아직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여기에도 홍숙자 여사가 있을지 모른다는 뒷말만 돌 뿐이다. (진싸 사실은 본인들만 알겠지)


[참고] 이기백(李基百) 장군은 1931년 10월 20일 충청남도 연기군 출생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석관(石寬)이다.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제5공화국에서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실세 장군이었다. 또 대국민 사기극 평화의 댐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전직 군장성 모임인 성우회 회원과 한나라당 특임고문으로 활동한 보수 정치인으로 비난을 많은 받는 대표적인 군출신 정치인.


5. 아웅산 테러 사건

1983년 10월 9일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당시 이기백은 육군 대장이며 합동참모의장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수행해 아웅산 묘역으로 갔던 것이며 이때 전속부관인 전인범 중위가 동행했다.

이날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데, 언론에는 이렇게 알려졌다. “폭탄 테러로 아수라장이 된 묘역에서 추가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그는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출해냈다.” 이 사건으로 전인범은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사건 당시를 조금 더 세밀히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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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대 포장된 진실

당시 방송에 내보낸 편집된 영상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발이 발생하자마자 바로 달려간 것처럼 알고 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전인범이 먼저 달려간 것이 아니었다. 다른 수행원들과 현지 경찰들이 먼저 사고 현장에 달려갔던 것이고 전인범은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 이는 전인범이 등장한 영상을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원본 영상을 보면 전인범은 부상당한 이기백을 발견하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 없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주변 도움으로 철판에 이기백을 싣고 여러사람이 같이 구해낸다. 전인범 혼자서 이기백을 구출해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전인범이 이기백을 도운 것은 맞다. 하지만, 전인범이 목숨을 걸고 2차 폭발의 위협을 무릅쓰고 달려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군대를 나온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똑같은 장소에서 연이어 폭발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폭발의 위력 때문에 동시에 다 터지고 만다. 그래서 군대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큰 폭발이 발생한 곳이나 폭탄이 터졌던 곳으로 숨는게 최선이라고 가르쳐 준다. 필자도 군생활 당시 교관에게 배운 내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전인범은 이기백의 전속 부관이다. 상관을 구출할 임무가 그에게 있는 것이다. 만일 전인범이 이기백을 업고 나오지 않았다면 군법에 회부될 사항이었다. 전속 부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부관으로서의 의무였다. 그런데 여럿이 함께 들고 나온 정도로 전인범이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은 것은 과했다고 본다. “수고했어” 한마디로 끝낼 정도 수준이었다. 만일, 들고 나온 상대가 이기백이 아니었다면 훈장은 없었다. 그리고 훈장을 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7. 정치적 상황

아웅산 테러 사건의 테러의 목표는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차량 정체로 도착시간이 지연되면서 운이 좋게 전두환이 도착 전 폭탄이 터졌던 것이며 무사했다. 하지만, 수행원들이었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등 한국인 17명과 버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사건 당시 현장 유일의 생존자는 바로 이기백 장군이었다. 당시 육군대장 이기백은 합동참모의장이었고,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동기이며 절친이었던 5공 실세 장군이었다. 사건 당시 국내 상황은 전두환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한 반감으로 국민들이 분노를 느낄 때였다. 이러한 때 전두환은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북한의 테러는 분명 비난 받아 마땅한 짓이지만 전두환은 이 사건을 이용해 안보를 이유로 언론과 인권을 통제하게 된다. 그리고. 전인범을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영웅으로 포장한다. 전인범이라는 과장되고 포장된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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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과장된 영웅

당시 전인범이 이기백을 업고 나온 것은 잘한 정도였다. 직속 부관으로서 당연히 할 도리이며 그러지 않았다면 그건 오히려 군법 위반이었다. 전인범이 이기백을 업고 나온 정도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구출해낸 진짜 시민 영웅들과 비견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당시 구출 상황이 폭탄이 터진 이후여서 두려움은 느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겁을 먹었을 뿐이다. 전인범의 행동은 칭찬은 받을 정도였지 훈장은 과했고 영웅 칭호도 심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필자 역시 자랑 같지만 구조 작업을 몇 번 해봐서 안다. 그 까짓것 정도라는 말 한마디로 끝냈고 단 한번도 상을 달라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 상을 받기 위해 누군가를 도운 적도 없다. 이는 대부분의 시민 영웅들의 공통된 마음가짐이다. 전인범처럼 영웅이랍시고 과시하는 사람보다는 묵묵히 남을 돕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9. 무책임한 지휘관

전인범이 구했다는 이기백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평화의 댐 사건의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전인범은 이런 자를 구했을지 모르지만 2014년 13공수에서 2명의 안타까운 젊은이들을 희생했다. 무엇보다 전인범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필자가 전인범 중장을 싫어하는 것도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영웅 행세를 하면서 인터넷 상에서 대단한 군인, 위대한 장군 흉내를 내는게 싫기 때문이다. 전인범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속죄하고 책임을 지기를 바란다. (참고글 =>(13공수 특전여단) 특전사 포로체험 훈련 사망사고 원인과 문제점.)


10 마무리.

마지막으로 현역 군인 신분으로 이처럼 과도한 홍보를 했던 군인은 여태 2명 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었다. 내가 전인범 중장을 경계했던 것도 현역 군인치고는 너무 홍보에 열을 올리는게 다소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너무 과장하고 있고 그래서 자꾸 경계심을 갖게 된다. 전두환의 절친이며 정치군인 이기백이 키워준 전인범은 계속해서 지켜 봐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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