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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중국 162

서한(전한)의 전성시대를 연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개요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재위 기간을 따져 보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36-1795년 재위)와 강희제(康熙帝 1662-1722년 재위)에 이어 한무제가 3번째로 54년간 재위에 있었다. 경제(景帝)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유철(劉徹 기원전 140-87년 재위)이 뒤를 이었다. 한(漢) 왕조에서 한무제(漢武帝) 유철은 고조 유방을 제외하면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업적만 갖고 논한다면 무제는 역사적으로 필적할 인물이 드물 정도로 무제 시대는 군사, 경제, 사상,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서한(西漢) 왕조의 극성기라 할 수 있다. 흔히 무제는 후대 황제들의 전형을 수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무제 시대는 한(漢) 대의 사상사, 문학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사, 경제사, 정치사의 영역에서도 획기적인 시대였다. 무제..

역사/중국 2015.12.25

전한 시대 오초칠국의 난(呉楚七国之乱) 과정과 영향 설명

기원전 154년 전한의 제후국 오나라의 왕 유비가 주축이 되어 조(趙)·교서(膠西)·초(楚)·교동(膠東)·치천(菑川)·제남(濟南) 여섯 나라와 함께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呉楚七国之乱)에 대해 설명해 본다. 전한 시대 오초칠국의 난(呉楚七国之乱) 과정과 영향 설명 1.개요기원전 154년 경제 시대 제후왕의 죄를 빌미로 오나라에도 봉토를 삭감하려 하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조(趙)·교서(膠西)·초(楚)·교동(膠東)·치천(菑川)·제남(濟南) 등 여섯 나라와 함께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2.오나라 왕 유비와 경제의 사적감정경제가 황태자 시절 오왕 비 ..

역사/중국 2015.12.23

문경지치의 완성 전한 경제 시대

5대 황제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경제 역시 훌륭한 임금이었다. 이 두 황제의 시기를 문경지치라고 부른다. 한 무제이 아버지이기도 한 경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문경지치의 완성 전한 경제 시대 1.개요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는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외척세가(外戚世家)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네 사람이 모두 문제가 대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79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씨가 무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아버지 문제와 더불어 선정을 배풀어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한무제의 아버지이며 훗날 ..

역사/중국 2015.12.23

도덕 군주 전한 문제 유항

여태후가 죽자 유씨들이 들고 일어난다. 결국 여씨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여태후의 후손은 대가 끊긴다. 여태후의 욕심에 결국은 유방의 다른 부인이었던 박씨의 후손들이 대대로 한나라의 황제가 된다. 여씨 시대를 종식하고 한나라를 안정시킨 도덕 군주이며 문경의 치(文景之治)의 시작이었던 한문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전한시대 증흥기를 이끈 도덕 군주 전한 문제 유항 1.개요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로 한 고조 유방의 4남이며 혜제(惠帝)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효문태후 박씨(孝文太后 薄氏)다. 대(代)나라 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역사/중국 2015.12.23

여태후의 시대

황제로 즉위한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어느정도 나라가 안정이 되자 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유방이 가장 경계했던 상대는 한신이었다. 하지만 결국 소하의 계략으로 한신은 처형당하고 많은 공신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유씨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유방에게 가장 큰 위기는 바로 흉노와의 전투였는데, 기원전 200년, 흉노의 묵돌 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백등산(白登山)에서 묵돌 선우에게 포위되고 만다. 백등산 포위전으로 이로 인해 유방과 묵돌 선우는 흉노를 형, 한을 동생으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하고 매년 조공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한이 흉노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후 회남왕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된 유방은 기원전 ..

역사/중국 2015.12.23

중국 한나라 전한 황제 (서한 황제) 계보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은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황조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황조다. 수도는 장안으로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5대 문제(文帝), 경제(景帝)에서 시작된 전한의 선정은 무제(武帝)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무제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은 결국 권력투쟁까지 했다. 그중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섭정하여 그 위세가 극에 달했고 결국 전한을 멸망시킨다. 이후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제위에 올랐고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방계 후손 유수(劉秀)에게 멸망당한다. 전한시대의 황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제1대 고조 유방한 태조 고황제 유방..

역사/중국 2015.12.20

황제가 된 한고조 유방, 한제국이 시작되다.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들에게 추대받으며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 한(漢)민족의 통합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한(漢)나라는 기원전 206년이 원년으로 그해 진왕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을 하고 4년후인 202년 고조5년에 황제에 오른 것이다. 이제 논공행상이 벌어지는데,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소하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리고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고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에 대한 한신과 사마천의 평가

항우는 20대 초반에 숙부를 따라 군사를 일으켰고 겨우 3년 만에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천하를 분할한 후 여러 공신들에게 왕, 후를 봉하니 당시 모든 정령(政令)이 항우에게 나왔다. 이 때문에 항우는 자신을 패왕이라 칭했다.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천하의 중심인 관중을 버렸고 아무 죄도 없는 의제를 쫓아내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제후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패자가 된지 겨우 5년 만에 유방에게 패배해 몰락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항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았으며 패왕의 공업이라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해 다스리려 했다. 그러다 겨우 5년 만에 마침내 나라..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의 최후

기원전 202년(한 고조 5년) 유방은 항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신, 팽월 등과 함께 연합하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초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유방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고 수비에 치중했다. 조급해진 유방이 장량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묻자 장량이 말했다. "초군이 망하려 하는데 한신과 팽월은 아직 나누어 받은 봉지가 없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군왕(君王)께서 천하를 그들과 함께 나누실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유방이 이 계책을 받아들여 초군을 물리치면 땅을 나눠주기로 약속한 후에야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움직였다.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가 출정하자 단번에 성부(城父)를 전멸시키고 해하(垓下 지금..

역사/중국 2015.12.19

성고전투의 패배

유방과 항우에 중립을 지키고 있던 팽월(彭越)이 나섰다. 팽월은 항우의 성격으로 보아 한(漢)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여겨 황하를 건넌 후 동아(東阿)에서 초군을 공격했다. 초나라 장수가 전사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우가 직접 나서 팽월을 공격했다. 한편, 유방은 승승장구하던 한신(韓信)의 군대를 빼앗은 후 황하를 건너 성고를 재탈환하고 광무(廣武)에 주둔했다. 항우 역시 팽월을 물리친 후 다시 광무에 진을 치고 한군과 수개월간 대치했다. 이때 팽월이 여러 차례 양(梁) 땅에서 교란하며 초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항우가 이를 걱정했다. 다급해진 항우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부친을 삶아 죽이겠다며 유방을 협박했다. 하지만유방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

역사/중국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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