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중국 162

후한 6대황제 안제 시기 등태후 권력 장악기

화제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했다. 외척 등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한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는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이유로 삼아 당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들이 쥐게 되는데 즉위한 이듬해 상제는 병으로 죽어 요절해 상(殤)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다. 상제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등태후는 청하왕 유경의 아들 유고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이가 바로 후한 6대 황제 한 효안황제 유호(漢 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다. 장제(章帝)의 손자로 본래 묘호로 공종(恭宗)이 올려졌지만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안제는 13세의 어린 ..

역사/중국 2016.06.27

외척과 환관의 득세, 후한 멸망의 시작 후한 4대황제 화제 (효화황제 유조) 시대

후한의 제4대 황제 한 효화황제 유조(漢 孝和皇帝 劉肇, 79년 ~ 106년, 재위 88년 ~ 106년) 3대 황제 장제(章帝)의 아들로 본래 묘호로 목종(穆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따라소 공식 묘호는 없다. 화제는 장제(章帝)의 서자로 넷째아들이다. 어머니는 귀인 양씨(貴人梁氏). 생모인 양귀인(梁貴人)은 궁정내의 다툼속에서 장제의 황후 두씨(竇氏)에게 살해당했다. 폐위된 이복형 청하효왕(유경)을 대신해 태자가 되고 88년 9살로 즉위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해 결국 황태후가 된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며 황태후의 오빠 두헌(竇憲)이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는데, 두헌은 흉노토벌에서도 전공을 세우게 되어 대장군이 ..

역사/중국 2016.06.27

후한 전성기의 끝 후한 3대 황제 장제 효장황제(孝章皇帝) 시기

명제의 뒤를 이어 후한 3대 황제 장제가 즉위한다. 후한 장제의 공식 시호는 한 숙종 효장황제 유달(漢 肅宗 孝章皇帝 劉炟, 57년 ~ 88년, 재위 75년 ~ 88년)로 명제(明帝)의 5남이다. 생모 가귀인(賈貴人)은 명제의 황후 마씨(마원(馬援)의 딸)과 사촌자매처럼 사이가 좋아 황제가 되는 이유가 된다. 장제는 60년(영평 3년) 3살이 되던 해에 황태자가 되고 75년(영평 18년) 아버지 명제가 붕어하여 19세에 황제로 즉위했다. 명제의 부인 마황후는 황태후로 세워 후견을 하였는데 마황후는 훌륭한 여성으로 태후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지만 친가 마씨 일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못하게 막아 그녀가 생존했던 장제의 시대도 외척이 등장하지 않았다. 장제 초기 마황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장제는 물론 후한..

역사/중국 2016.06.27

후한시대 반초의 서역 개척

반초(班超, 32년 - 102년)는 서안 근처 샨시성 함양(咸陽)출신으로 역사가 반표(班彪)의 아들이며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의 아우로 이 세 사람을 삼반(三班)이라 칭한다. 자는 중승(仲升)이다. 광무제의 통치 기간 기마부대를 이끌고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해 전한의 장건의 활약 이후 끊겼던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여 후한과 서역의 교역길을 열었다. 그의 원정대는 파르티아와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 정리해 본다.후한시대 반초의 서역 개척 광무제가 후한을 창업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오랫동안 방치했던 서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서역에 원정군을 파견한다. 반초는 이 시기의 사람으로 한서의 저자 반고의 동생으로 어려서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포부가 커 제2의 장건을 꿈꾸었다..

역사/중국 2016.06.22

후한시대 한서(漢書)는 반고(班固) 가족 모두가 만들었다.

한서(漢書)는 전한서라고도 하며반고가 편찬한 전한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에 포함된다.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4년까지 총 100편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져, 제기(帝紀) 12권, 연표 8권, 지(志) 1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되어 있다. 재료가 풍부하고 사실(史實)의 정확하다 평가를 받고 있다. 사기와 함께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저자는 반고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집안 사람들이 모두 함께한 위대한 역사서이다. 정리해 본다.후한시대 만들어진 한서(漢書)는 반고(班固) 가족 모두가 만들었다.한서의 저자 반고(班固, 건무 8년(32년) ~ 영원 4년(92년)) 풍(扶..

역사/중국 2016.06.22

후한 2대 황제 후한명제 (효명황제 유장)와 현명한 마황후(명덕황후 마씨)

광무제의 선정으로 나라는 안정이 되고 뒤를 이어 후한 2대황제 효명황제가 즉위를 한다. 명제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후한 2대 황제 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漢 顯宗 孝明皇帝 劉莊)과 현명했던 황후 명덕황후 마씨(明德皇后 馬氏) 후한의 제2대 황제 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漢 顯宗 孝明皇帝 劉莊, 28년 ~ 75년; 재위 57년 ~ 75년) 다른 이름으로는 양(陽)이 있으며 자는 자려(子麗)이다. 광무제(光武帝)의 넷째아들이다. 묘호는 현종(顯宗).서기 28년 생모 광렬황후 음려화(당시는 귀인)가 원씨에서 유양을 낳았다. 10살에는 춘추를 읽는등 총명해 광무제에게 사랑받았다. 39년 동해공으로 봉해졌다. 41년 황후 곽황후가 품위를 잃는 행동을 하자 광무제는 곽황후를 폐하고 음귀인(음려화)를 황후로 앉힌..

역사/중국 2016.06.20

후한 시대(동한) 혼란 상태를 정상으로 돌린 광무제 유수의 선정

광무제가 건국한 후한은 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 시대의 연장선에 있다. 유방의 후손인 광무제는 이를 분명히 해 후한 창업을 한왕조 부흥(한의 재건)임을 분명히 했다. 우선 광무제는 낙양을 첫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한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낙양이 장안의 동쪽에 있기때문에 전한을 서한, 후한을 동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왕조를 화덕(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 광무제 유수의 훌륭한 점은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황제였다는 점이다.전한 말과 왕망의 신나라를 거치며 중국 전역이 피폐해져 전한 전성기에는 약 6천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광무제 ..

역사/중국 2016.06.20

광무제 유수의 후한 창업

경시제 유현의 무능함에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전한과 신나라의 멸망후 여전히 혼란은 수습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시기 유수(광무제)는 많은 제장들과 민심을 얻어 드디어 천자에 오른다.이때가 서기 25년 6월로 호남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낙양을 수도로 정했다. 건무 2년에 고조묘를 세워 자신의 창업이 한나라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했다.그리고 광무제는 장안의 경시제와 적미군 등과의 일전을 치르게 된다. 이 시기 적미군은 한고조의 손자 유장(성양경왕)을 신으로 숭앙하고 있었는데, 유장의 후손 중인 유분자를 천자로 옹립한다. 유분자는 당시 15세였고, 황족임에도 불우해 글조차 배우지 못한 무식한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반란군과 군벌들이 난립해 매우 어지러운 상황에서 백..

역사/중국 2016.04.30

현한 경시제 유현 (玄漢 更始帝 劉玄) 황제가 된 이유와 최후

현한 경시제(玄漢 更始帝 劉玄, ? ~ 25년)는 중국 왕망의 신나라를 타도하는 반군들에 의해 옹립된 현한의 제1대 황제로 형주 남양군 채양현 사람이다. 전한 경제의 6대손이며 후한 광무제의 족형이다. 현한 경시제 유현 (玄漢 更始帝 劉玄) 황제가 된 이유와 최후 1. 유현 황제가 된 이유반란군들이 수가 늘고 통솔할 지휘관이 있어야 했다. 유연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남양 호족들은 유연을 지지하지만, 신시와 평림군 장수들은 유연의 뛰어남과 결단력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허수아비 같은 황제를 원했다. 그래서 옹립된 자가 바로 경시제 유현이다. 2. 현한 건국경시제 유현은 22년 녹림군의 농민반란이 발생한 후 진목(陳牧)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해 23년 정월 녹림군 등 연..

역사/중국 2016.03.21

녹림 적미의 난 (적미군, 녹림군), 곤양전투, 왕망의 신나라의 멸망

황위를 찬탈 하고 신 왕조를 세우고, 주(周) 시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의 신나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으로 민심을 잃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또 주변국이었던 흉노(匈奴), 서강(西羌), 고구려(高句麗) 등의 국가들에게도 반감을 샀다. 내부의 혼란과 외교의 고립까지 신나라는 곧 멸망할 운명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녹림군과 적미군에 대해 알아 본다.녹림·적미의 난 (적미군, 녹림군)과 왕망의 신나라의 멸망 1.배경왕망 이전인 전한시대 후반부터 민란은 계속 있어왔지만,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한 후 백성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면서 왕망을 타도하겠다는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터져나온다. 이들중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농민 봉기군이 녹림군..

역사/중국 2016.02.1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