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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중국 162

인재를 내치는 항우와 목숨을 버리는 유방의 장수들

유방은 원래 형양에서 황하(黃河)로 통하는 길을 수리해 진나라의 식량창고인 오창(敖倉)의 양식을 조달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이를 알고 군사를 보내 식량을 탈취해갔다. 군량이 부족해진 유방은 서둘러 항우와 강화를 체결해 형양 서쪽으로 퇴각하려 했다. 항우가 이를 수락하려 했으나 지금 유방을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범증의 간언을 듣고 형양을 포위해 유방을 죽이리라 결심했다. 다급해진 유방에게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의심이 많은 항우의 성격을 이용해 범증과의 사이를 갈라놓을 이간책을 벌인다. 항우의 사신이 왔을 때 성대한 주연을 베풀려고 하다 "아부(亞父 범증)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로군."이라고 말한 후 형편없는 음식을 가져다 접대하자 분개한 사신이 돌아와 항우에게 ..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의 반격과 유방의 위기

한편 유방이 공격의 방향을 항우가 있는 동쪽으로 향하자 크게 노한 항우가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에 임명해 유방의 공격을 막게 했다. 그러자 유방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장량을 항왕에게 보내 원래 약조대로 관중을 얻을 수 있게 해주면 즉시 동쪽으로의 진격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항우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조(趙)나라와 제(齊)나라가 손을 맞잡고 초나라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항우도 마지못해 수락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제나라와 교전했다. 이때 항우가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의 군대를 징발했으나 경포는 정세를 관망하기 위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크게 원망하게 된다. 한편 한나라 다섯 제후의 연합 군이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당시 항우는 제나..

역사/중국 2015.12.19

한나라 사직을 세우다.

한왕(漢王)이 된 유방은 함양에 진입할 때 유방을 따르던 병사들이 10만에 달했지만 항우는 이중 3만 명만 따라가게 했다. 하지만 초나라와 다른 제후국(주로 전국시대 진나라 지역을 가리킴)에서 유방의 명성을 흠모해 따라온 사람이 또 수만 명에 달했다. 유방은 한중(漢中)에 진입한 후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를 불태워버렸다. 잔도란 절벽에 구멍을 뚫고 이 구멍에 기둥을 가로 질러 만든 일종의 인공 도로이다. 당시 한중으로 향하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곳곳마다 이런 잔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방이 이렇게 한 이유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추격병을 따돌리고 항우에게 자신은 함양으로 돌아갈 뜻이 없으며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원래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금의환향 할 것으로 믿..

역사/중국 2015.12.19

의제를 죽이고 민심을 잃은 항우

기원전 206년 4월이 되자 함양에 머물던 각국 제후들은 각기 병사들을 해산해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다. 항우 역시 초나라로 돌아갔다. 항우는 의제에게 사자를 보내 천도를 강요했다. 표면적인 구실은 원래 제왕의 거처는 강의 상류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의제의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의제가 거추장스러워진 항우는 몰래 손을 써서 형산왕, 임강왕에게 알려 장강(長江) 가운데서 의제를 살해하게 했다. 항우 입장에서 볼 때 의제는 자신이 세운 허수아비 황제였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해오자 천하 패권을 차지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의제를 그대로 둔다면 자신이 실권은 있을지언정 명실상부하 패왕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

역사/중국 2015.12.19

함양을 불태우고 서초패왕이 된 항우

며칠 후 항우의 40만 군대가 함양에 도착했다. 항우는 투항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항우는 재화와 보물, 여자들을 차지한후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함양의 거리는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항우는 고향인 동쪽(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장수들과 앞으로의 일을 논했다. 한 장수가 이에 답했다."관중(關中)은 사방이 산하로 막혀 있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왕(覇王)이 될 만한 좋은 곳입니다."그러나 항우는 궁궐이 이미 불탔고 고향이 그리워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하고는 동쪽으로 돌아갔다.항왕에게 권고했던 사람이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관을 쓴 격이라고 하더니 과..

역사/중국 2015.12.19

홍문(鴻門)의 위기

항우가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했지만 유방이 이미 함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가 난 항우는 병사들에게 함곡관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관내에 들어간 항우가 희수(戱水) 서쪽에 이르자 유방은 패상(覇上 지금의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했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趙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크게 노한 항우는 유방의 군대와 일전을 벌여 격파하리라 다짐했다. 당시 항우의 병사는 40만으로 신풍(新豊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과 홍문(鴻門 산언덕 이름)에 주둔해 있었고, 유방의 10만 병사들은 패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직접 전쟁을 치른다면 유방에게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때 범증이 항우에게 권고했다...

역사/중국 2015.12.19

유방의 함양 입성

이즈음 유방의 책사가 된 역이기(酈食其)의 계책으로 무혈로 진류(陳留)을 얻게 되고 진군해 개봉(開封)을 공락하고 한에 들러서 소수 병력으로 고전하던 한의 왕성과 장량을 구원하고 진군을 내쫓아 한을 재건했고 그 은의를 내세워 장량을 객장(客將)으로서 빌린다. 나아가 남양(南陽)을 공략하고 성주가 도망치고 없는 완[宛,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남양南陽]을 포위해 항복시키는 등 진군 속도가 항우보다 빨랐다. 이유는 유방은 항복한 성주에게 관용을 베풀어 불필요한 소모전을 막았기 때문이다. 유방은 관중 남부 관문인 무관(武關)까지 이르렀고 이 무렵 항우도 조에서 진군 주력을 격파했고 진 내부는 크게 동요했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를 내세워 전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는 패전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이 책임질까 ..

역사/중국 2015.12.19

투항한 진의 장수 장함, 진의 병사를 생마장한 항우

이때 진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극원(棘原)에 주둔하고 있던 장함이었다. 당시 초군의 기세에 눌린 장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는 대신 장기전을 준비하며 대치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이세가 사람을 보내 장함을 꾸짖으며 공격에 나설 것을 독촉하자 후환이 두려워진 장함은 심복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황제를 알현하게 했다. 하지만 함양에 도착한 사마흔이 3일을 머물렀음에도 간신 조고(趙高)의 방해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위험을 눈치 챈 사마흔이 급히 자신의 부대로 돌아오자 조고가 군사를 보내 추격해왔다. 사마흔은 장함에게 돌아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고가 궁 안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제대로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이 전투..

역사/중국 2015.12.19

항량의 최후

초나라는 항량이 만들었고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을 칭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주관했었다.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고 어느 정도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 항량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를 공격했다. 그는 제(齊)나라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부대와 연합해 동아(東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항량은 이 기세를 모아 계속 진군(秦軍)을 추격해 서쪽으로 진격할 것을 촉구했으나 제나라는 고질적인 내분에 휩싸여 더 이상 진군할 의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항량은 유방과 항우에게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유방과 항우가 나서서 성양(城陽)을 전멸시키고, 복양(濮陽) 동쪽에서 진군을 격파하며 수차례 전과를 올리자 항량은 점차 진나라를 경시하고 교만해지기..

역사/중국 2015.12.19

유방에게 인재가 모이다.

초회왕은 누구든지 함곡관(函谷關)에 먼저 진입해 관중을 평정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진나라의 병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직접 진군과 맞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여러 장수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먼저 진군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단 숙부 항량의 전사에 분노한 항우와 건달 출신으로 두려움이 없었던 유방만이 함곡관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회왕이 초나라의 여러 원로 장수들에게 누구를 서정 책임자로 정할지 묻자 신하가 이렇게 답했다."항우는 사람됨이 성급하고 사나우며 남을 잘 해칩니다. 일찍이 양성을 공략했을 때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생매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무참히 섬멸 당하곤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덕망 있고 관대한 사람을 보내 인의를 베풀..

역사/중국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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