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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홍문(鴻門)의 위기

항우가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했지만 유방이 이미 함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가 난 항우는 병사들에게 함곡관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관내에 들어간 항우가 희수(戱水) 서쪽에 이르자 유방은 패상(覇上 지금의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했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趙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크게 노한 항우는 유방의 군대와 일전을 벌여 격파하리라 다짐했다. 당시 항우의 병사는 40만으로 신풍(新豊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과 홍문(鴻門 산언덕 이름)에 주둔해 있었고, 유방의 10만 병사들은 패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직접 전쟁을 치른다면 유방에게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때 범증이 항우에게 권고했다...

역사/중국 2015.12.19

유방의 함양 입성

이즈음 유방의 책사가 된 역이기(酈食其)의 계책으로 무혈로 진류(陳留)을 얻게 되고 진군해 개봉(開封)을 공락하고 한에 들러서 소수 병력으로 고전하던 한의 왕성과 장량을 구원하고 진군을 내쫓아 한을 재건했고 그 은의를 내세워 장량을 객장(客將)으로서 빌린다. 나아가 남양(南陽)을 공략하고 성주가 도망치고 없는 완[宛,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남양南陽]을 포위해 항복시키는 등 진군 속도가 항우보다 빨랐다. 이유는 유방은 항복한 성주에게 관용을 베풀어 불필요한 소모전을 막았기 때문이다. 유방은 관중 남부 관문인 무관(武關)까지 이르렀고 이 무렵 항우도 조에서 진군 주력을 격파했고 진 내부는 크게 동요했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를 내세워 전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는 패전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이 책임질까 ..

역사/중국 2015.12.19

투항한 진의 장수 장함, 진의 병사를 생마장한 항우

이때 진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극원(棘原)에 주둔하고 있던 장함이었다. 당시 초군의 기세에 눌린 장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는 대신 장기전을 준비하며 대치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이세가 사람을 보내 장함을 꾸짖으며 공격에 나설 것을 독촉하자 후환이 두려워진 장함은 심복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황제를 알현하게 했다. 하지만 함양에 도착한 사마흔이 3일을 머물렀음에도 간신 조고(趙高)의 방해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위험을 눈치 챈 사마흔이 급히 자신의 부대로 돌아오자 조고가 군사를 보내 추격해왔다. 사마흔은 장함에게 돌아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고가 궁 안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제대로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이 전투..

역사/중국 2015.12.19

항량의 최후

초나라는 항량이 만들었고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을 칭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주관했었다.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고 어느 정도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 항량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를 공격했다. 그는 제(齊)나라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부대와 연합해 동아(東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항량은 이 기세를 모아 계속 진군(秦軍)을 추격해 서쪽으로 진격할 것을 촉구했으나 제나라는 고질적인 내분에 휩싸여 더 이상 진군할 의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항량은 유방과 항우에게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유방과 항우가 나서서 성양(城陽)을 전멸시키고, 복양(濮陽) 동쪽에서 진군을 격파하며 수차례 전과를 올리자 항량은 점차 진나라를 경시하고 교만해지기..

역사/중국 2015.12.19

유방에게 인재가 모이다.

초회왕은 누구든지 함곡관(函谷關)에 먼저 진입해 관중을 평정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진나라의 병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직접 진군과 맞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여러 장수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먼저 진군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단 숙부 항량의 전사에 분노한 항우와 건달 출신으로 두려움이 없었던 유방만이 함곡관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회왕이 초나라의 여러 원로 장수들에게 누구를 서정 책임자로 정할지 묻자 신하가 이렇게 답했다."항우는 사람됨이 성급하고 사나우며 남을 잘 해칩니다. 일찍이 양성을 공략했을 때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생매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무참히 섬멸 당하곤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덕망 있고 관대한 사람을 보내 인의를 베풀..

역사/중국 2015.12.19

패공이 된 유방 장자방을 만나다.

진이세(秦二世) 원년인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이 기현(蘄縣)에서 봉기해 진현(陳縣)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여 옛 초나라의 뒤를 이었음을 주장했는데 진의 폭정에 신음하던 수많은 군현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 냈다. 이때 패현 백성들도 소문을 듣고는 현령(縣令)을 죽인 후 유방을 맞아들여 패공(沛公)으로 삼았다. 원래 당시 나이로 보나 직위로 볼 때 유방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패현의 관리로 있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현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혹시라도 실패하여 책임 추궁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다. 이들은 평소 허풍이 세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유방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았다. 당시 패현 사람들이 선뜻 유방..

역사/중국 2015.12.19

고대 중국 상나라를 부흥시킨 상 무정(武丁)

고대 중국 상나라를 부흥시킨 상나라의 왕 자소 (子昭) 무정(武丁)에 대해 알아 본다.1.즉위초무정(武丁, BC 1250 - BC 1192)은 상나라의 제23대 왕으로 성은 자(子), 이름은 소(昭),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소을제(小乙帝)의 아들이자 반경의 손자이다. 태자 시절부터 현인 감반(甘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사기》에는 소을의 아들로써 뒤를 이어 즉위하여 쇠약한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지만 자신을 보좌해줄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그는 3년 동안 부왕의 빈소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서경》무일편) 상태로 정치에 관해서는 모두 총재(塚宰)에게 맡긴 채로 지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글로 써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무정이 병에 걸려 벙어리가 되었다고 수군거렸..

역사/중국 2015.12.18

프랑스 혁명 요약

1787~99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대혁명에 대해 정리해 본다.1789년에 첫번째 절정에 이르렀는데 흔히 쓰이는 '1789년 혁명'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일컬으며 후에 일어난 1830, 1848년의 혁명과 구별해 쓰이기도 한다. 이 혁명의 동기에 대해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이 인구를 충분히 먹여살릴 수 없었다. ②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부유한 부르주아지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제도적으로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③ 농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대착오적이고 짐스러운 봉건제도를 지지하는 경향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④ 사회적..

역사/세계사 2015.12.18

영국 입헌군주제의 출발점 명예 혁명 요약

명예 혁명은 1688~89년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제임스 2세가 퇴위하고 그의 딸 메리 2세와 네덜란드의 스테드호우데르(총독)이며 오라녜 공인 메리의 부군 윌리엄 3세(오라녜 공 빌렘)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제임스 2세는 1685년 왕위에 오른 후 노골적인 가톨릭 편중 정책을 펴 영국인들의 인기를 상실했다. 1687년 신앙자유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을 공포하여 비국교도에 대한 법적 제재를 금지했으며, 1688년 4월에는 제2차 신앙자유령을 모든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2주 연속 이 선언을 낭독하도록 명령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다른 6명의 주교들은 제임스 2세에게 이같은 조치에 반대하는 청원을 제출했으나 이들은 모두 선동 비방죄로 기소당했다. 그들은 ..

역사/세계사 2015.12.18

청교도 혁명 설명 (1642~51)

청교도혁명은 영국에서 의회세력과 군주정세력 간에 발생한 싸움(1642~51)이다.스코틀랜드와 벌인 주교전쟁(1639, 1640)에 의해 내란이 촉발되었는데 찰스 1세는 주교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640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찰스 1세 진영과 하원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찰스 1세는 1642년 1월 4일 5명의 하원의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1월 10일 런던을 떠났고 양측 모두는 전쟁을 준비했다. 애초에 양 진영의 병력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각기 약 1만 3,000명 정도). 1645년 의회파가 신형군을 창설할 때까지는 왕당파가 기병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의회파가 재력면에서 왕당파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싸움의 최종 결과를 예상할 수 ..

역사/세계사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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