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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중국 한나라 전한 황제 (서한 황제) 계보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은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황조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황조다. 수도는 장안으로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5대 문제(文帝), 경제(景帝)에서 시작된 전한의 선정은 무제(武帝)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무제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은 결국 권력투쟁까지 했다. 그중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섭정하여 그 위세가 극에 달했고 결국 전한을 멸망시킨다. 이후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제위에 올랐고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방계 후손 유수(劉秀)에게 멸망당한다. 전한시대의 황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제1대 고조 유방한 태조 고황제 유방..

역사/중국 2015.12.20

황제가 된 한고조 유방, 한제국이 시작되다.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들에게 추대받으며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 한(漢)민족의 통합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한(漢)나라는 기원전 206년이 원년으로 그해 진왕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을 하고 4년후인 202년 고조5년에 황제에 오른 것이다. 이제 논공행상이 벌어지는데,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소하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리고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고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에 대한 한신과 사마천의 평가

항우는 20대 초반에 숙부를 따라 군사를 일으켰고 겨우 3년 만에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천하를 분할한 후 여러 공신들에게 왕, 후를 봉하니 당시 모든 정령(政令)이 항우에게 나왔다. 이 때문에 항우는 자신을 패왕이라 칭했다.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천하의 중심인 관중을 버렸고 아무 죄도 없는 의제를 쫓아내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제후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패자가 된지 겨우 5년 만에 유방에게 패배해 몰락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항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았으며 패왕의 공업이라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해 다스리려 했다. 그러다 겨우 5년 만에 마침내 나라..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의 최후

기원전 202년(한 고조 5년) 유방은 항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신, 팽월 등과 함께 연합하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초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유방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고 수비에 치중했다. 조급해진 유방이 장량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묻자 장량이 말했다. "초군이 망하려 하는데 한신과 팽월은 아직 나누어 받은 봉지가 없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군왕(君王)께서 천하를 그들과 함께 나누실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유방이 이 계책을 받아들여 초군을 물리치면 땅을 나눠주기로 약속한 후에야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움직였다.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가 출정하자 단번에 성부(城父)를 전멸시키고 해하(垓下 지금..

역사/중국 2015.12.19

성고전투의 패배

유방과 항우에 중립을 지키고 있던 팽월(彭越)이 나섰다. 팽월은 항우의 성격으로 보아 한(漢)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여겨 황하를 건넌 후 동아(東阿)에서 초군을 공격했다. 초나라 장수가 전사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우가 직접 나서 팽월을 공격했다. 한편, 유방은 승승장구하던 한신(韓信)의 군대를 빼앗은 후 황하를 건너 성고를 재탈환하고 광무(廣武)에 주둔했다. 항우 역시 팽월을 물리친 후 다시 광무에 진을 치고 한군과 수개월간 대치했다. 이때 팽월이 여러 차례 양(梁) 땅에서 교란하며 초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항우가 이를 걱정했다. 다급해진 항우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부친을 삶아 죽이겠다며 유방을 협박했다. 하지만유방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

역사/중국 2015.12.19

인재를 내치는 항우와 목숨을 버리는 유방의 장수들

유방은 원래 형양에서 황하(黃河)로 통하는 길을 수리해 진나라의 식량창고인 오창(敖倉)의 양식을 조달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이를 알고 군사를 보내 식량을 탈취해갔다. 군량이 부족해진 유방은 서둘러 항우와 강화를 체결해 형양 서쪽으로 퇴각하려 했다. 항우가 이를 수락하려 했으나 지금 유방을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범증의 간언을 듣고 형양을 포위해 유방을 죽이리라 결심했다. 다급해진 유방에게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의심이 많은 항우의 성격을 이용해 범증과의 사이를 갈라놓을 이간책을 벌인다. 항우의 사신이 왔을 때 성대한 주연을 베풀려고 하다 "아부(亞父 범증)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로군."이라고 말한 후 형편없는 음식을 가져다 접대하자 분개한 사신이 돌아와 항우에게 ..

역사/중국 2015.12.19

항우의 반격과 유방의 위기

한편 유방이 공격의 방향을 항우가 있는 동쪽으로 향하자 크게 노한 항우가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에 임명해 유방의 공격을 막게 했다. 그러자 유방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장량을 항왕에게 보내 원래 약조대로 관중을 얻을 수 있게 해주면 즉시 동쪽으로의 진격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항우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조(趙)나라와 제(齊)나라가 손을 맞잡고 초나라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항우도 마지못해 수락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제나라와 교전했다. 이때 항우가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의 군대를 징발했으나 경포는 정세를 관망하기 위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크게 원망하게 된다. 한편 한나라 다섯 제후의 연합 군이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당시 항우는 제나..

역사/중국 2015.12.19

한나라 사직을 세우다.

한왕(漢王)이 된 유방은 함양에 진입할 때 유방을 따르던 병사들이 10만에 달했지만 항우는 이중 3만 명만 따라가게 했다. 하지만 초나라와 다른 제후국(주로 전국시대 진나라 지역을 가리킴)에서 유방의 명성을 흠모해 따라온 사람이 또 수만 명에 달했다. 유방은 한중(漢中)에 진입한 후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를 불태워버렸다. 잔도란 절벽에 구멍을 뚫고 이 구멍에 기둥을 가로 질러 만든 일종의 인공 도로이다. 당시 한중으로 향하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곳곳마다 이런 잔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방이 이렇게 한 이유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추격병을 따돌리고 항우에게 자신은 함양으로 돌아갈 뜻이 없으며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원래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금의환향 할 것으로 믿..

역사/중국 2015.12.19

의제를 죽이고 민심을 잃은 항우

기원전 206년 4월이 되자 함양에 머물던 각국 제후들은 각기 병사들을 해산해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다. 항우 역시 초나라로 돌아갔다. 항우는 의제에게 사자를 보내 천도를 강요했다. 표면적인 구실은 원래 제왕의 거처는 강의 상류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의제의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의제가 거추장스러워진 항우는 몰래 손을 써서 형산왕, 임강왕에게 알려 장강(長江) 가운데서 의제를 살해하게 했다. 항우 입장에서 볼 때 의제는 자신이 세운 허수아비 황제였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해오자 천하 패권을 차지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의제를 그대로 둔다면 자신이 실권은 있을지언정 명실상부하 패왕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

역사/중국 2015.12.19

함양을 불태우고 서초패왕이 된 항우

며칠 후 항우의 40만 군대가 함양에 도착했다. 항우는 투항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항우는 재화와 보물, 여자들을 차지한후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함양의 거리는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항우는 고향인 동쪽(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장수들과 앞으로의 일을 논했다. 한 장수가 이에 답했다."관중(關中)은 사방이 산하로 막혀 있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왕(覇王)이 될 만한 좋은 곳입니다."그러나 항우는 궁궐이 이미 불탔고 고향이 그리워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하고는 동쪽으로 돌아갔다.항왕에게 권고했던 사람이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관을 쓴 격이라고 하더니 과..

역사/중국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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