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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조선 임금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생애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년 음력 9월 ~ 1391년 10월 21일(음력 9월 23일))는 조선 태조(太祖)의 첫 아내로 정종과 태종의 생모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생전에는 단 한번도 왕비기 된 적이 없지만, 그녀의 아들 태종 이방원과 그 후손이 조선의 임금이기에 조선 임금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한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조선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이며, 조선 임금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생애 1.생애 요약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는 1337년 음력 9월 당시 고려 동북면 영흥(永興) 풍류산 아래 금리(琴理)에서 호족으로 태어났다. 원신택주, 절비 등으로 봉해졌고 추존왕후로 신의왕후 (신의고황후)로 ..

역사/인물 2015.12.10

에드워드 8세 (윈저공)와 심프슨 부인 히틀러의 지지자였다. 윈저공과 심슨부인 실체

미국 이혼여성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Wallis Warfield Simpson)과 결혼을 하기 위해 왕위를 남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고 에드워드 8세에서 윈저 공으로 신분이 바뀐 사건으로 세기의 로맨스로 알려진 이들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삶은 화려했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왕위를 버리고 심프슨 부인의 세기적인 로맨스를 이룬 주인공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윈저공 히틀러 지지자였다? 로맨스로 가려진 이들 부부의 실체를 알아 본다. 1.에드워드 8세 요약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의 국왕 겸 인도의 황제(영어: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Em..

역사/인물 2015.12.10

1980년 12월 8일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 살해 사건 요약

1980년 12월 8일 사망한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 살해 사건에 대해 요약해 본다. 1. 존 레논 개요존 윈스턴 오노 레논(John Winston Ono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의 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 (John Winston Lennon)으로 이후 오노 요코와 결혼 후 존 윈스턴 오노 레논(John Winston Ono Lennon)으로 개명했다.비틀즈의 창립 멤버로 폴 매카트니와의 공동 작곡(레논-매카트니)을 통해 "로큰롤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음악을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 폴 매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이며 「기네스 월드 레코즈」에서는 가장 성공한 작곡 팀의 한 명으로서 차트 1위의 곡이 미국에서 동료 폴 매..

역사/세계사 2015.12.08

고려멸망 조선건국의 원인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원명 교체기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만주와 요동을 명의 영토로 삼으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 분쟁이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고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한다. 고려의 요동정벌이 바로 이런 명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요동정벌과 이어진 위화도 회군에 대해 정리해 본다. 고려멸망 조선..

적제(赤帝)의 아들이 백제(白帝)의 아들을 베다.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당시 진나라는 혼란한 시기였다. 당시 정장의 임무는 주로 국가를 대신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노역(勞役)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유방이 직무상 부역(賦役)에 종사할 사람들을 데리고 역산(酈山)까지 인솔을 하는데, 당시 뒤숭숭한 사회분위기 속에 도처에서 도망자가 생겼고 유방이 인솔하던 무리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도망쳤다. 이대로 역산에 도착한다면 사람이 불과 몇 명 남지 않을 것이고, 단 한명이라도 도망자가 생기면 인솔 책임자도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 속에서 책임 추궁이 두려워 악착같이 임무를 수행하거나 혹은 자기 목숨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제 살길만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유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방은 풍읍(豊邑) 서쪽에 있는 늪지에 이..

역사/중국 2015.12.07

유방의 젊은 시절과 관상

젊은시절 유방은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고 늘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 도량이 넓었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지녔던 그는 일반 백성들이 하던 힘든 농사일이나 작업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방은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는 백수건달이었다. 1. 착실했던 형 유중당시 유방의 모습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유방에게는 유중(劉仲)이란 바로 손위의 형이 있었는데 그는 유방과는 달리 착실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유방은 늘 형과 비교되곤 했다. 태공은 유방에게 "너는 재주가 없어 생업도 꾸려나가지 못할 처지임에도 왜 늘 형처럼 노력하지 않느냐?"라고 탓하곤 했다. 이것이 한에 맺혔던지 유방이 나중에 황제가 된 후 태상황으로 추대된 부친을 축수하며 자신과 형인 유중 중에서 누가 더 큰 업적을 쌓았..

역사/중국 2015.12.07

유방의 탄생 신화와 출신 배경

진나라가 멸망의 수순을 밟고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수 많은 반란이 일어난다. 여기에 가장 큰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은 항우지만 훗날 전국을 통일한 것은 유방이었다. 1.개요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한나라(漢)의 초대 황제(재위 :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이다. 자는 계(季)이다.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秦)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가 항우(項羽)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한나라를 세웠다. 정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

역사/중국 2015.12.07

제후군의 상장군이 된 항우

초나라 군대가 정도에서 대패하고 나라의 기둥이던 항량이 전사하자 회왕(懷王)은 큰 두려움에 휩싸여 도읍인 우이(盱台)를 버리고 팽성으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회왕은 항우, 여신(呂臣 초나라 장수)의 군대를 통합해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여신의 부친인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으며 유방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아 무안후(武安侯)에 봉했다. 또 송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으며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했다. 여기서 송의가 상장군이 된 데에는 고릉군의 추천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릉군이 일찍이 회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송의가 무신군의 군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 말했는데 며칠 후 과연 그의 말대로 무신군의 군대가 패했습니다...

역사/중국 2015.12.06

초회왕(楚懷王) 옹립

이때 최초로 군대를 일으켰던 진왕(陳王) 진승이 진(秦)나라 군대에 패해 사망한 것이 알려지자 항량은 각지의 반란군 장수들을 설현에 불러 모아 대사를 의논했다. 패(沛)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던 유방(劉邦)도 패공(沛公)의 신분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지 반란군들은 군사를 일으킨 뚜렷한 목적이나 구호가 없었다. 그보다는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한 민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다. 항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새나라 창업같은 것은 계획에 없었다. 항연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는데, 범증(范增)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범증은 원래 거소(居鄛 지금의 안휘성 소현)사람으로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었다. 평소 벼슬을 하기보다 집에 머물며..

역사/중국 2015.12.06

반란군의 주력으로 성장한 항량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은 이때 진왕(陳王)을 칭하고 있었다. 진승의 부하 소평(召平)은 광릉 공격에 나선 진왕(陳王)이 패주해 진(秦)나라 토벌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떨다 진왕의 명령을 사칭하며 항량에게 접근했다. 소평은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한 후 서쪽으로 진격해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항량은 소평의 말을 믿고 8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인근 동양현(東陽縣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에서는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로 감옥 관리를 담당) 진영(陳嬰)이 자의반타의반 현령으로 추대되어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항량은 자신의 군대가 규모가 작아 진영의 군대와 연합해 서쪽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진영의 모..

역사/중국 201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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